[황금빛 신비의 나라 미얀마 ⑥ 미얀마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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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신비의 나라 미얀마 ⑥ 미얀마의 종교]
[천득염의 건축인문기행] 인구 90%가 불교신자...男, 일생에 한번은 승려생활
불교, 국민들에 삶의 가치·방향 제시...일상 속에선 토속 신앙 ‘낫’ 숭배
모두가 같은 종교로 강한 공동체 의식...역대 통치자들, 국민통합 위해 불교 장려
2020년 02월 05일(수) 00:00
버간의 힌두교 사원 '낫라옹 짜웅'
미얀마인들은 상좌부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일부는 토속신앙인 정령(精靈)을 믿고 의지하며 숭배하고, 유교적 생활양식과 전통을 중시한다. 즉 정령신앙과 상좌부불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대승불교, 힌두교 등의 다양한 종교를 믿는다. 종교별 분포는 불교가 89.5%로 압도적으로 많고, 기독교 5%, 이슬람교 4%, 힌두교 0.05%, 정령 숭배 1.5%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토속신앙으로서 정령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불교를 믿는 대중들의 마음속에 아주 다양하고 훨씬 넓게 자리하고 있어 국민 대부분이 정령을 믿는다 함이 더 옳은 표현이다.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정령 낫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신앙에 가깝다. 정령 신앙은 모든 사물에 영혼이 들어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많은 나라에 정령신앙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미얀마에서는 절대적이다. 자연물에도 사람과 같이 감정과 생각, 영혼이 있어 자연물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미얀마의 종교는 외형적으로는 불교가 지배적이지만 일상에서는 쉽게 토속신앙인 낫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미얀마인들은 길흉화복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가 인간 스스로 주체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령인 낫이 결정한다고 믿는다.

첫 번째 통일 왕조인 바간왕조를 이룩한 아노라타 왕은 당시 만연한 정령신앙으로는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상좌부 불교를 국교화 하고 수많은 낫의 수를 37개체로 줄인 후 사원의 한 쪽에 모아 놓았다. 그러나 기존의 낫에 미련이 남아 있던 일부 백성들은 낫에 기원하려면 사원에 가야했다.

불교를 제외하고 미얀마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인구의 90%가량이 불교를 믿는다. 불교는 국민들에게 삶의 가치와 방향을 제시해주고 국민 모두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다. 미얀마 남자들이라면 일생에 한 번쯤 머리를 깎고 승려 생활을 한다. 10세 전후에 치루는 불교 출가의식인 신퓨(Shin Pyu) 의식을 거쳐야 한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는다. 모든 가정에 불상을 보시고 헌화하고 경배한다. 세계 최빈국이지만 다이아몬드와 루비 등 값비싼 보석들이 불탑의 첨탑에 수없이 안치되고 거대한 불상을 금으로 도금하며 보시하는 돈이 불전함에 가득하다.

양곤의 성마리 성당 전경
불교가 곧 미얀마인들의 삶이기 때문에 역대 통치자들은 국민통합과 민족의 정체성 유지를 위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 장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깊게 믿고 있는 낫 신앙과 불교와 유사한 힌두교 등을 불교가 포용함으로써 다양한 종족간의 통합과 종교간의 마찰을 줄일 수 있었다.

미얀마 승려의 하루는 탁발로 시작된다. 많은 신도들이나 관광객들이 보시를 통하여 신앙적인 구원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같은 때에 여자 스님인 비구니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상좌부 불교에서 비구니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비구니는 수도자라는 뜻의 ‘딸라신’이라고 부른다. 가사 역시 다르다. 비구가 적색인 반면 딸라신은 분홍색이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은 참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90%에 가까운 불교도 사이에 무슬림은 4%정도로 소수이지만 미얀마에서 살고 있는 미얀마국민이다. 아직 이슬람의 지배력이 크지 않았던 시기인 16세기 미얀마 북서부에 있던 라카인 왕국에선 몇 명의 왕이 술탄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런 칭호는 당시 이슬람 왕국이었던 벵골지역을 지배하기 위해서였다고 간주된다.

이슬람교가 미얀마에 실제적으로 유입된 것은 19세기 인도인에 의해서이다. 미얀마 왕국과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자신들의 점령지 건설을 위해 인도인 기술자들을 데려왔다. 무슬림이었던 인도인 기술자들은 신앙생활을 위한 모스크를 미얀마에 건설했고, 이슬람교는 그 모스크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늘어갔다. 오늘날 국제사회에 인권문제가 되고 있는 로힝아족들은 영국 식민지가 시작되고 나서 벵골지역에서 이주해 온 종족으로 미얀마 정부에서는 그들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 불교를 믿고 살고 있는 버마족 사이에서 그들은 아주 소수로서 무슬림이며 북서부 라카인주에 모여살고 있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국민들에게 삶의 가치와 강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다. 여성 수행자들인 ‘딸라신’. <사진=위키디피아>
16세기 일치감치 동양에 진출했던 포르투갈 선교사와 상인, 그리고 선원들을 통해 미얀마에 천주교가 소개되었다. 중국의 해상 패권이 줄어들고 시간이 흘러 포르투칼,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의 무역선이 동남아 해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처음엔 해적으로, 후에는 동남아 왕국들에 머물며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그들은 현지인과 가정을 꾸몄고, 그들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유입되고 유지되었다. 본격적인 천주교의 시작은 1829년에 영국령 몰라마인에 성 패트릭(St Patric) 성당이 세워지면서 부터다.

미얀마의 기독교는 영국 지배기인 1827년에 미국인 침례교 선교사인 Adoniram Judson 박사가 영국령이 된 몰라마인에 제일 침례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사실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는 사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문명의 개화라는 명분하에 신학교와 함께 교회가 세워졌고, 수업에는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채플 과목이 포함되었다.

또한 영국 총독부가 통제하기 쉬운 미얀마를 만들기 위해 미얀마 족과 소수 종족들 사이의 분리 정책을 추진하였다. 역사적으로 중앙의 통제에서 멀었던 북부 산악지역의 까친족과 동남부 산악지역의 꺼인족들에게 기독교 선교를 강화시켜 분리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 이유로 이 지역엔 기독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오랜 불교적인 전통의 벽에 부딪혀 기독교의 확산은 제한적이다. 현재 천주교와 기독교 교인의 수는 약 6% 정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국가 미얀마에 힌두교의 유입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사이 초기 왕국인 중부 지방의 쀼 왕국와 남부 지방의 몬 왕국, 그리고 서북부 지방의 라카인 왕국에서 나타난다. 인도로부터 북쪽으로 이주해 온 귀족층과 상업 활동을 위해 남쪽으로 유입된 상인층을 통해 힌두교는 미얀마에 소개되었다. 도시의 지명, 유물, 왕의 칭호, 중국인들의 기록 등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힌두교는 일반인에게 까지 확산되지 않았고, 오히려 같은 시기에 유입된 불교가 더 일반적이었고 널리 확대되었다.

그후 1885년, 영국이 미얀마를 점령하고, 새로운 수도로 양곤을 건설하면서 노동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많은 인도인들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영국은 당시 버마를 인도의 한 주(州)로 편입시켰기 때문에, 남 인도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양곤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 시기에 남부 인도인들과 함께 힌두교가 다시 들어왔으나 오랜 세월 동안 불교도로서 살았던 미얀마 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힌두교는 이주해온 일부 인도인만의 종교로 남았다. 신자는 약 1% 내외이고 그들을 위한 미얀마형식의 벽돌조 힌두교 사원이 아주 드물게 건립되어 있다. <전남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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