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시민군1·2·3 -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2024년 05월 16일(목) 21:30
198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일곱 살 이었던 탓에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진 못하지만 총성이 가장 요란했던 걸로 볼때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진행된 5월 27일로 추정한다. 우리 집은 전남도청이 지척인 동구 학운동 낡은 골목 맨 끝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장발의 남자 세 명이 어깨에 총을 메고 들어와 하룻밤 잠을 청했다. 밥과 국이 담긴 냄비들이 연탄불 위에 다시 올려졌고 찬이 상 위에 놓여지기 무섭게 그들의 식사는 끝이 났다. “총알을 막을 수 있다”며 엄마가 머리 끝까지 덮어준 솜이불 속에서 누나와 함께 밥을 먹는 그들을 숨죽여 지켜봤다.

총소리가 거세질수록 고양이며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우리 가족의 귀는 마당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잡아낼 정도로 예민했지만 건넌방의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새벽녘, 채 어둠이 가시기 전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왔던 것처럼 조용히 떠났다.

된장찌개 냄새 가득한 골목에서 더는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집으로 달려가지 않을 정도로 자랐을 때, 그들이 시민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말 하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다그침을 여러 번 들어야 했을 때, 그날의 진실이 담긴 사진첩과 영상도 보게 됐다. 여전히 그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생사는 궁금하다. 5·18민주묘지 유영보관소와 기록관에서 사망자 사진을 볼때면 늘 ‘그들’이 궁금하다. 여전히 이름 없는 시민군1·2·3은 그날 골목을 나와 자신들의 집으로 갔을까 아니면 도청의 동료에게로 갔을까. 그날 밤 초라한 밥상이 그들의 마지막 만찬은 아니었을까.

5·18 공법단체의 각종 비리로 광주가 시끄럽다. 이름이 알려지거나 이름 알리기에만 급급한 오월 인사들이 이름값은 못한 채 청구서만 내밀면서 벌어진 일이다. 일부 인사가 시민을 쫓고 ‘5월의 주인’ 행세를 한 탓이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닌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이다. 5·18기념재단 창립선언문의 숭고한 의미를 지키는 게 시민군1·2·3을 영원히 기억하는 길이 아닐까.

/kro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