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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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18 기념식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1980년 5월18일에 태어난 유가족 김소형(여·37) 씨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내려 가자 문재인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편지 읽기를 마친 그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 꼭 껴안고 위로했다. 지금도 눈시울을 붉히며 이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기억 방식은 문 대통령 재임기에만 유효할지 모른다. 정권이 바뀌면 나라의 기억법은 바뀌기 때문이다. 집권자에 따라 ‘국가가 기념하는 5월’이 부침을 겪어 온 것은 우리가 이미 37년 동안 경험해 온 바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의 5·18 기념사에는 눈여겨볼 대목이 있었다. 30여 년 세월이 흘러 기억 밖으로 밀려나 있던 인물들을 소환한 것이 그것이다. 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 등 네 명의 민주 열사들. 사실 대통령의 이러한 이름 부르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과 세월호 대국민담화에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과 달리 문 대통령의 호명은 광주의 폐부를 건드린다. 이들은 ‘5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분들이며 굳이 옥쇄(玉碎: 부서져 옥이 된다는 뜻으로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을 이르는 말)를 자청해 5월의 진실을 알린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그동안 ‘민주 열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이들을 기억했다. 박관현 열사를 제외한 나머지 이름들이 그토록 희미해졌던 이유다. 문 대통령은 그 이름들을 우리에게 하나하나 들려주면서 광주의 망각을 질책했던 건 아닐까. 이들은 국가가 아니라 바로 광주가 기억하고 불러주었어야 할 이름들이었다.
인간의 고통과 교감하자
5·18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38년이 됐다. 그동안 우리는 5월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민주·인권·평화’라는 5월 정신을 싹 틔운 ‘인간의 고통’과 진실로 교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 찾기와 자리매김에 매몰된 탓에 희생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소통할 기회는 방기되었다. 그러니 ‘5월의 철학자’ 김상봉 교수가 저서 ‘철학의 헌정’에서 강조한 말은 뼈아프다. “언제 우리는 5·18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우리가 5·18의 고통에 참여하는 때입니다. 5·18이라는 사건 자체나 그것이 추구한 이념이 아니라 그에 참여한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5월27일, 최후 항전지인 도청 본관에는 죽음 앞에서 고뇌했고 절규했던 인간들이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생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나마, 부끄럽게도 그날 절명한 이들의 최후를 살필 수 있다.
“계엄군을 쏘려고 창가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쏘지 말라고 만류했다. 총을 팽개쳐 버리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을 각오를 하고 그때까지 남아 있었지만 막상 마지막 순간이 되니 두렵고 온갖 생각이 다 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부모님이었다. 부모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죽으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야, 인마. 얼른 일어나야.’ 몸을 만지니 따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나하고 장난치던 애가 죽으니까 정말 그때서야 죽음이라는 게 실감 났다.”(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1990년)
5·18을 이해하는 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죽음을 예감한 마지막 순간 부모님이 보고 싶다는 간절함,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적을 보고도 총을 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눈물. 이게 5월의 참모습 아닐까. 5월의 전위(前衛)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던 훌륭한 분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할 이들은 두려움과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우리의 이웃이라고 믿는다.
5월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다시 5월이다. 광주시 북구 민주로 200번지 국립 5·18민주묘지에는 5월 당시 희생자를 포함한 유공자 797명이 잠들어 있다. 유족들이 고인을 추억하며 묘비 뒷면에 새겨 놓은 절절한 글을 더듬다 보면 여러 순수한 영혼들을 만날 수 있다. 차마 유족들이 글을 써 넣지 못한 묘비도 있으며, 그 묘비 아래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떠나야 했던,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쳤던 이들이 누워 있다.
이번 38주년 5·18 기념식을 계기로 5월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은 혹시 그날의 희생자와 문득 교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다면 즉시 5·18추모관으로 발길을 돌려 ‘염원의 벽’에 그의 이름을 적어 주면 좋겠다. 37년 동안 가족 외에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그의 이름 말이다.
/penfoot@kwangju.co.kr
그럼에도, 문 대통령의 5·18 기념사에는 눈여겨볼 대목이 있었다. 30여 년 세월이 흘러 기억 밖으로 밀려나 있던 인물들을 소환한 것이 그것이다. 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 등 네 명의 민주 열사들. 사실 대통령의 이러한 이름 부르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과 세월호 대국민담화에서 그렇게 했다.
인간의 고통과 교감하자
5·18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38년이 됐다. 그동안 우리는 5월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민주·인권·평화’라는 5월 정신을 싹 틔운 ‘인간의 고통’과 진실로 교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 찾기와 자리매김에 매몰된 탓에 희생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소통할 기회는 방기되었다. 그러니 ‘5월의 철학자’ 김상봉 교수가 저서 ‘철학의 헌정’에서 강조한 말은 뼈아프다. “언제 우리는 5·18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우리가 5·18의 고통에 참여하는 때입니다. 5·18이라는 사건 자체나 그것이 추구한 이념이 아니라 그에 참여한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5월27일, 최후 항전지인 도청 본관에는 죽음 앞에서 고뇌했고 절규했던 인간들이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생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나마, 부끄럽게도 그날 절명한 이들의 최후를 살필 수 있다.
“계엄군을 쏘려고 창가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쏘지 말라고 만류했다. 총을 팽개쳐 버리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을 각오를 하고 그때까지 남아 있었지만 막상 마지막 순간이 되니 두렵고 온갖 생각이 다 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부모님이었다. 부모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죽으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야, 인마. 얼른 일어나야.’ 몸을 만지니 따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나하고 장난치던 애가 죽으니까 정말 그때서야 죽음이라는 게 실감 났다.”(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1990년)
5·18을 이해하는 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죽음을 예감한 마지막 순간 부모님이 보고 싶다는 간절함,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적을 보고도 총을 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눈물. 이게 5월의 참모습 아닐까. 5월의 전위(前衛)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던 훌륭한 분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할 이들은 두려움과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우리의 이웃이라고 믿는다.
5월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다시 5월이다. 광주시 북구 민주로 200번지 국립 5·18민주묘지에는 5월 당시 희생자를 포함한 유공자 797명이 잠들어 있다. 유족들이 고인을 추억하며 묘비 뒷면에 새겨 놓은 절절한 글을 더듬다 보면 여러 순수한 영혼들을 만날 수 있다. 차마 유족들이 글을 써 넣지 못한 묘비도 있으며, 그 묘비 아래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떠나야 했던,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쳤던 이들이 누워 있다.
이번 38주년 5·18 기념식을 계기로 5월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은 혹시 그날의 희생자와 문득 교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다면 즉시 5·18추모관으로 발길을 돌려 ‘염원의 벽’에 그의 이름을 적어 주면 좋겠다. 37년 동안 가족 외에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그의 이름 말이다.
/penfoot@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