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인문도시’란 무엇일까? - 김형중 조선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문도시광주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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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인문도시’란 무엇일까? - 김형중 조선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문도시광주위원회 위원장
2025년 11월 24일(월) 00:20
ACC 창조원 앞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진 팻말이 하나 세워져 있다. ‘Made 人 Korea, 문화로 산업을 창조하다.’ 한국산을 의미하는 ‘K’라는 영문 철자 하나가 한국의 모든 문화영역을 ‘산업’의 영역으로 이전시키는 마법의 접두사가 된 지는 오래되었다.

K음식, K팝, K불교, K의료, K미용, K드라마, K문화콘텐츠, 심지어 K민주주의 등등. 이 접두사가 붙는 순간 유형과 무형의 모든 문화 생산물은 수출과 등가교환이 가능한 상품이 된다. 그래서인지 문화로 ‘산업을 창조한다’라는, 모호하고(산업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어리석을 만큼 솔직한 문구는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Made 人 Korea’라니! 한국이 사람을 ‘만든다니’! 누가 고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읽어도 익숙해지기 힘든 ‘반문화적’이고 ‘반인문적’인 문구다.

고지식하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말해, 애초에 ‘인문학과 문화예술’은 ‘산업’과 양립할 수 없다. 양자가 서로 다른 경제 메커니즘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산업이 ‘교환의 경제’에 속한다면, 문화예술은 ‘증여의 경제’에 속한다. 교환의 경제는 투자와 회수,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른다. 반면 증여의 경제는 준 만큼(실은 그보다 더 많이) 돌려받는다는 교환의 논리를 모른다. 마르셀 모스나 조르주 바타이유가 종종 보고했던 ‘포틀래치’가 그 예다. 한국의 경우라면 아마도 ‘잔치’ 정도가 그에 상응하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잔치 벌여 놓고 돈 받으면 욕먹기 십상이다.

대가와 회수를 바라지 않는 증여, 내가 보기에 이 표현은 문화예술에 대한 최소 정의다. 근대 이후로 우리는 예술 작품을 ‘유용성으로부터 해방된 사물’로 여겨왔다. 누구도 고흐의 그림 앞에서 감탄은 할지언정 효용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바흐를 들으며 그 화성의 조화를 만끽은 하되, 소리의 쓸모를 궁리하지도 않는다. 사물도 소리도 붓질도 그것이 원래 ‘사용’되던 유용성의 맥락에서 벗어났는가의 여부에 따라 예술 작품이 되거나 말거나 한다. 뒤샹의 변기는 화장실이라는 유용성이 맥락에서 벗어나 ‘사심 없는 관조’(칸트의 표현이다)의 대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술 작품의 지위로 등극한다.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쓸모와 교환가치(Made 인 Korea)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본성(이런 것이 없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리고 근래에는 인간과 관계 맺는 무수한 객체들과의 합당한 공생을 탐구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인간의 쓸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인간을 쓸모에 따라 ‘생산’해 내는 것(Made)은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의 살벌한 경쟁 메커니즘에나 어울린다.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인문학을 멀리하는 이유다.

작년 이맘때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광주는 ‘인문도시’를 표방했다. 기념물보다는 ‘책을 많이 읽는 도시’를 만들어 달라는 한강의 전언에 강기정 시장이 반응한 결과다. ‘인문도시광주위원회’가 발족했고, 나는 그 위원장직을 수행했다. 임기가 다 되어 가는 지금 돌아보면 해 놓은 게 별로 없다. 주야 없이 일하는 시청 관계자들의 노고에는 놀랐다. 광주라는 이름의 인문도시를 꿈꾸는 여러 위원들의 진심도 지켜봤다. 그러나 부족한 예산과 장기적 전망 부재로 인해 이름도 거창한 ‘인문도시 광주’는 그 첫발이나 뗐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글은 초심으로 돌아가 ‘인문도시 광주’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다시 생각하자는 제안에 가깝다. 인간만의 지구가 아닌 행성 전체 존재자들의 평화를 고민하는 도시, 난민들과 성적소수자들과 망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들락거리고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논쟁이 많이 일어나는 도시, 한해 내내 규모가 크건 작건 각종의 영화제와 공연과 전시회가 상시적으로 열리는 도시, 도서관과 서점마다 작가들의 발이 끊이지 않는 도시, 양질의 책을 가장 많이 읽고 만드는 도시, 말하자면 ‘쓸모없는’ 것들의 생태계가 완성된 도시, 광주….

만약 광주라는 이름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우수 ‘브랜드’가 되고자 한다면, 바로 저와 같은 ‘전략적 반산업화’를 통해서일 수밖에 없다고 (이 역설이 씁쓸하긴 하지만) 나는 믿는 편이다. 행정이라곤 쥐뿔도 모르는 인문학자의 허황된 망상이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멀리까지 모험하는 사유로서의 인문학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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