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정글의 법칙 - 임몽택 미네르바 코칭앤컨설팅 대표, 전 광주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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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무한경쟁의 사회를 ‘정글’이라고 부른다. 부와 권력 같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약육강식’에 내몰리는 냉혹한 사회가 마치 먹이나 서식지를 두고 모든 생명체가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밀림’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정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비유다. 사자가 가젤을 쫓는 장면, 아나콘다가 먹이를 통째로 삼키는 장면 같은 ‘경쟁’과 ‘포식’의 순간만을 보면 ‘정글’은 약육강식의 현장이다. 그러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글’은 지구상에서 가장 고도화된 ‘상호 의존’의 시스템이자 ‘연대’의 결정체다.
정글이 수천만 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에게 의존하는 ‘상호 의존성의 원리’ 때문이다. 즉 수많은 종(種)이 꽃가루를 나르고, 씨앗을 퍼뜨리며, 뿌리가 서로 얽혀 영양분을 공유하는 ‘공생과 협력’, 한 생명의 죽음이나 배설물조차 어떠한 낭비도 없이 즉시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되는 ‘완벽한 자원의 순환’, 한두 종이 사라져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수만 종이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다양성을 통한 안정성’이 바로 그것이다.
생태학적 측면에서 보면 사회 역시 개인, 집단, 제도라는 구성체들이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생태계다. 따라서 한 사회가 수천만 년을 지속하려면 ‘정글’처럼 ‘상호 의존성의 원리’에 따라 작동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그 원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현상이 아무도 자신의 삶을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논리다.
‘각자도생’은 신뢰가 무너진 시스템의 산물이자 공포에 기반한 합리적 생존 전략이다. 즉 ‘각자도생’은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나 공동체가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진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적 전략이다. 따라서 ‘각자도생’을 이기심이나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치부하는 일은 옳지 않다. 더구나 ‘각자도생’은 그동안 공적 안전망이 부족한 우리 사회를 지속시킨 동력이 되기도 했다. 국가가 책임지지 못하는 부분을 개인이 스스로 해결했기 때문에 국가는 공적 안전망 구축에 대한 부담을 덜고 성장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각자도생’은 개인이 생존을 위해 감당해야 할 비용과 책임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히려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자기 파괴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초저출산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출산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매우 중요한 요인임에도 젊은이들은 ‘각자도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이 감당해야 할 가장 크고 위험한 비용인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사회적 연대와 협력이 어려운 현상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면 ‘신뢰’와 ‘연대’라는 사회적 자본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각자도생’은 타인을 협력의 파트너가 아니라 한정된 자리를 두고 싸워야 할 경쟁자로 인식한다. 심지어 기후 위기, 연금 고갈 등 사회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 앞에서조차 “나 살기도 바쁜데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가?”라는 ‘각자도생’의 논리가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다,
과거의 ‘각자도생’이 ‘하면 된다’는 식의 성장 동력이었다면, 지금은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공포의 기제가 되어 사회의 성장 잠재력도 떨어뜨린다. 실패 이후를 보장해 줄 사회적 안전망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창의적인 도전이나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인재들이 실패 위험이 없는 의사, 변호사 같은 안정적인 직종으로 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각자도생’은 심지어 삶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빈곤, 실업 등 구조적인 문제조차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극심한 스트레스, 우울증,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은 ‘각자도생’ 시스템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 사회가 영원히 지속되려면 사람들에게 ‘각자도생’보다 ‘공존·공생’이 더 자신의 생존과 번영에 유리하다는 ‘사회적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안정적인 주택 보급, 공교육 강화, 그리고 노후를 보장하는 연금 시스템 등 필수 영역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구축해야 한다. 둘째, 다양한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성공’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안전망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셋째,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어떤 직업을 갖든, 어떤 삶을 선택하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소득, 일자리, 문화적 격차를 줄여야 한다.
‘각자도생’은 신뢰가 무너진 시스템의 산물이자 공포에 기반한 합리적 생존 전략이다. 즉 ‘각자도생’은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나 공동체가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진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적 전략이다. 따라서 ‘각자도생’을 이기심이나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치부하는 일은 옳지 않다. 더구나 ‘각자도생’은 그동안 공적 안전망이 부족한 우리 사회를 지속시킨 동력이 되기도 했다. 국가가 책임지지 못하는 부분을 개인이 스스로 해결했기 때문에 국가는 공적 안전망 구축에 대한 부담을 덜고 성장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각자도생’은 개인이 생존을 위해 감당해야 할 비용과 책임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히려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자기 파괴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초저출산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출산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매우 중요한 요인임에도 젊은이들은 ‘각자도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이 감당해야 할 가장 크고 위험한 비용인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사회적 연대와 협력이 어려운 현상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면 ‘신뢰’와 ‘연대’라는 사회적 자본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각자도생’은 타인을 협력의 파트너가 아니라 한정된 자리를 두고 싸워야 할 경쟁자로 인식한다. 심지어 기후 위기, 연금 고갈 등 사회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 앞에서조차 “나 살기도 바쁜데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가?”라는 ‘각자도생’의 논리가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다,
과거의 ‘각자도생’이 ‘하면 된다’는 식의 성장 동력이었다면, 지금은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공포의 기제가 되어 사회의 성장 잠재력도 떨어뜨린다. 실패 이후를 보장해 줄 사회적 안전망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창의적인 도전이나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인재들이 실패 위험이 없는 의사, 변호사 같은 안정적인 직종으로 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각자도생’은 심지어 삶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빈곤, 실업 등 구조적인 문제조차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극심한 스트레스, 우울증,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은 ‘각자도생’ 시스템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 사회가 영원히 지속되려면 사람들에게 ‘각자도생’보다 ‘공존·공생’이 더 자신의 생존과 번영에 유리하다는 ‘사회적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안정적인 주택 보급, 공교육 강화, 그리고 노후를 보장하는 연금 시스템 등 필수 영역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구축해야 한다. 둘째, 다양한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성공’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안전망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셋째,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어떤 직업을 갖든, 어떤 삶을 선택하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소득, 일자리, 문화적 격차를 줄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