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 대통령 하야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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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전 옛일을 기억해 본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그때의 일. 1964년 5월 27일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전남대학교 학생 데모의 추억담이다. 어떻게 해야 그때의 기억을 제대로 살려 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차에 책꽂이 깊숙이 꽂혀 있는 몇 권의 책을 다행히 찾아냈다. 그 시절은 이미 군사독재 권력에 언론이 재갈 물려 있던 때여서 당시의 언론 보도나 책으로 기록된 내용은 희귀했다. 하지만 우선 27일 다음 날인 5월 28일자 ‘전남매일신문’(광주일보 전신)의 사설을 찾을 수 있었다. 20년 뒤인 84년 7월에 간행된 ‘해방 후 한국학생운동사’(형성사, 이재오 저)라는 귀중한 자료도 찾아냈다.
64년 학기 초부터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한일회담이 굴욕외교라고 규정하고 한일회담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연일 학생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시위 세력의 약화를 꾀하기 위한 술책과 위계만 남발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때였다.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전남대생들은 5월 27일, ‘애국충정 있거든 하야로 보답하라’ ‘권고 권고 하야 권고’ ‘광주발언 취소하고 네 책임 네가 져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4·19 이후 군사정부의 퇴진과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학생 시위에 등장했던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위의 책 p229)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은 전남대학교에서 군사정부의 퇴진과 대통령 하야를 주장한 데모가 4·19 이후 최초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당시 광주의 양대 일간지의 하나이던 ‘전남매일신문’은 석간 5월 28일자 사설에서 그 전날 대통령 하야 데모를 상세히 알리면서 학생 데모를 권력 당국은 혁신계 세력의 책동, 불순 세력의 방조로 일어났다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면서 그때 외쳐진 구호를 열거해 놓았다. “구속된 애국 학생 상장 주어 석방하라” “최루탄 곤봉으로 우리 자유 못 막는다” “정절 높은 귀부인에 윤간이란 웬 말이냐” “배고파 못 살겠다 부정 재벌 잡아먹자”라는 강한 구호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야(下野)를 권고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들이댄 데모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내용도 담았다.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상당 기간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군부독재 기구로 국민을 압제해 오다 헌법에 따라 정권을 이양하라는 국민의 힘에 밀려 1963년 대통령 선거로 그해 11월 정식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니 64년 5월이면 취임한 지 겨우 6개월 정도인데 참고 참다가 견디지 못한 전남대생들은 온갖 독재와 악행을 저지르는 군사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하야를 최초로 부르짖은 것이다. 이후 그해 여름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가에는 대통령 하야 데모가 봇물 터지듯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박 정권은 결국 위수령 발동, 계엄령 선포 등의 온갖 강압적 수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기에 이른다.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 32년 뒤인 1996년 3월에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라는, 경향신문 신동호 기자의 집필로 ‘도서출판 예문’에서 간행된 책이다. “그해 4월 초 장준하·강문봉 등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 … 학내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터진 것이 ‘박정권 하야’를 요구한 5·27 데모였다. … 이 데모는 박석무가 주동한 용봉골 6·3운동의 최대 사건이었다. 박석무는 이 시위 주동을 계기로 전남대 학생운동의 거물로 떠오른다. 5·27데모는 박석무 혼자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언문과 플래카드를 그가 직접 집에서 만들었고 군중 동원과 선언문 낭독도 그가 했으며 데모대의 투석전을 지휘한 것도 그였다. 그는 ‘신망 잃은 박정권 하야를 권고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숨기고 아침 일찍 ‘황금버스’(노란색 통학버스)가 출발하는 계림동 파출소 정류장에 나갔다.…”(p176)라며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주간경향에 연재하다 뒤에 책으로 간행하였다.
역시 기록은 무섭다. 잊혀진 55년 전의 옛일을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동호 기자가 기록한 대로 그 5·27데모는 학생들이 경찰의 최루탄을 뚫고 투석전으로 맞서며 도청 앞까지 진출한 광주학생운동 첫 번째의 쾌거였다. 그 데모로 6·3학생운동은 전남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또 그 뒤 60년대, 70년대, 80년대 전남대 학생운동의 강고한 투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제 반세기 전 투쟁의 그런 역사도 제대로 간추려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상당 기간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군부독재 기구로 국민을 압제해 오다 헌법에 따라 정권을 이양하라는 국민의 힘에 밀려 1963년 대통령 선거로 그해 11월 정식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니 64년 5월이면 취임한 지 겨우 6개월 정도인데 참고 참다가 견디지 못한 전남대생들은 온갖 독재와 악행을 저지르는 군사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하야를 최초로 부르짖은 것이다. 이후 그해 여름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가에는 대통령 하야 데모가 봇물 터지듯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박 정권은 결국 위수령 발동, 계엄령 선포 등의 온갖 강압적 수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기에 이른다.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 32년 뒤인 1996년 3월에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라는, 경향신문 신동호 기자의 집필로 ‘도서출판 예문’에서 간행된 책이다. “그해 4월 초 장준하·강문봉 등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 … 학내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터진 것이 ‘박정권 하야’를 요구한 5·27 데모였다. … 이 데모는 박석무가 주동한 용봉골 6·3운동의 최대 사건이었다. 박석무는 이 시위 주동을 계기로 전남대 학생운동의 거물로 떠오른다. 5·27데모는 박석무 혼자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언문과 플래카드를 그가 직접 집에서 만들었고 군중 동원과 선언문 낭독도 그가 했으며 데모대의 투석전을 지휘한 것도 그였다. 그는 ‘신망 잃은 박정권 하야를 권고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숨기고 아침 일찍 ‘황금버스’(노란색 통학버스)가 출발하는 계림동 파출소 정류장에 나갔다.…”(p176)라며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주간경향에 연재하다 뒤에 책으로 간행하였다.
역시 기록은 무섭다. 잊혀진 55년 전의 옛일을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동호 기자가 기록한 대로 그 5·27데모는 학생들이 경찰의 최루탄을 뚫고 투석전으로 맞서며 도청 앞까지 진출한 광주학생운동 첫 번째의 쾌거였다. 그 데모로 6·3학생운동은 전남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또 그 뒤 60년대, 70년대, 80년대 전남대 학생운동의 강고한 투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제 반세기 전 투쟁의 그런 역사도 제대로 간추려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