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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 과학이라는 이데올로기
2017년 10월 24일(화) 00:00
“우리는 알 수 없을 뿐이다.”(We simply do not know) 경제학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케인스가 미래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 수학 전공자이며 확률론 논문으로 모교의 종신 펠로우에 올랐지만, 수학과 확률의 도식론(formalism)을 통해 경제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태도를 누구보다도 불신했다. 케인스 대하 전기를 썼던 역사학자 스키델스키는 이런 불신이 “사회적 삶의 복잡성과 성찰적 성격에 대한 케인스의 이해가 점차 깊어진 것”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케인스 ‘일반이론’의 태동에 참여했고, 케인스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던 리처드 칸은 ‘일반이론’이 ‘수학적 도식과 하찮은 대수’로 환원된 것을 큰 비극이라며 탄식했다.

가령 물물교환 아닌 화폐경제 체제에서는 ‘불확실성’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케인스 경제학의 주된 사상이지만, 갈수록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탐닉해 온 현대경제학은 종종 불확실성 개념을 ‘확률적 리스크’란 말로 대체하여 미래가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내보인다. 미래에 대해 신뢰할 만한 예측을 하려면 미래의 샘플을 추출하고 분석해야 하지만, 미래로부터 샘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의 샘플이 과거와 현재 데이터에서 추출된 그것과 동일하다고 가정함으로써 불확실한 미래에 고도의 통계적 정밀성을 지닌 확실성의 외양을 덧씌운다.



미래 지식은 확증할 수 없다



그러나 “빙판이 얇으면 스케이트 날을 벼릴수록 위험은 오히려 증가한다”는 것이 케인스의 지론이었다. 월가가 수백 명의 수학 전공자들을 고용해 만들었다는 기상천외한 파생상품들에 개인과 기관투자가들이 다투어 올인했다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던 얼마 전의 금융 위기가, 이와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식(방법)론이 과학에 포획된 것이 경제학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가령 최근 한 장관 후보자의 사퇴로 불거진 창조과학을 둘러싼 논란은 어떤가. 신학자 팀 켈러에 따르면, 성경은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매우 선택적으로만 전해주며, 과학적·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드러내(reveal)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성경은 신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과 역사에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관해선 침묵한다. 창조론도 창조와 관련한 ‘왜?’에 대한 답변, 곧 인간은 분자들의 우연한 조합이 아니라 목적을 지닌 피조물이라는 점 외에, ‘어떻게?’ ‘얼마 전에?’라는 질문에는 속 시원한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런 것이다.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 들수록, 창조의 참뜻은 가려지고 원래 의의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지식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이론은 가설이다. 이론이 이론인 것은 그것이 반증(反證) 가능해서 잠정적이라는 가정 때문이다. 하버드의 철학자 토마스 쿤은 아예 자연과학의 발전도 학문 공동체의 기존 합의가 붕괴할 때 혁명적으로 온다고 말했다. 진화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중간화석의 부재)에 관한 더 이상의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진화론에 대해 최종적인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진화론이 이론이 아니라면 신앙일 터이고, 이론이라면 반증 가능한 가설이어야 한다. 물론 인간의 지적·도덕적·미학적 능력은 자연도태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은 또 다른 차원의 담론이다.



열린 사회 위한 겸손한 이성



철학자 칼 포퍼가 마르크스 등의 ‘역사주의’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을 때, 그는 역사주의자들의 과학관이 부적절하다는 점, 곧 지식 등 기존의 조건들이 미래에도 지속되리라는 가정을 할 수 없는 한, 불가피한 어떤 미래를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물론 ‘역사주의’는 열린 체제로서의 민주주의 정신에도 반한다. 정치사회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불확정성의 제도화’로 요약했거니와, 정치를 확정적으로 창출하려 할 때, 독재는 탄생한다.

자기 언명의 우월함을 보이기 위해 가장 흔히 동원되는 것이 과학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다”) 니체가 말했듯 진리 주장을 앞세워 상대를 제압하려는 태도는 물론 폭력적이지만, 언뜻 관용적으로 읽히는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절대언명’도 권력 놀음이긴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과학을 숭배하는 태도와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세상은 회색지대로 넘치고, 삶은 새로운 기회들(second chances)로 충만하다.

궁극적 ‘지금’이란 없으며, 오늘은 미래 언제고 폐기될 수 있거니와, 이성을 중시하되 유보하는 미학도 배워야 한다. 조심스럽게 불확실성을 제거해 나갈지언정, “마침내 최종 결론을 얻었다!”는 태도는 순진하고 위험하다. 과학적 귀납을 구성하는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말할 수 없이 불완전하다는 것, 미지의 시공간적 사례들은 늘 존재하며 관찰자의 눈엔 이미 편견이 깊이 개입해 있다는 점을 부단히 상기해야 한다. 단정하고 단언하는 사회는 과장과 과시로 병들어 가기 마련이다. 작금 나라 안팎의 범람하는 말의 폭력들을 우연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