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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옥숙 인문지행 대표]나는 욕망의 진짜 주인일까
2016년 05월 16일(월) 00:00
요즈음엔 자신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능력이다. 자신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까지 드러내는 데에 사용되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가 욕망이라는 단어다. 욕망은 왠지 입에 올리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어감을 가진 단어임에도 어느 사이에 일상적 언어가 되었다. ‘아저씨의 욕망’, ‘아줌마의 욕망’이니 하는 표현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것이다.

욕망의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은 ‘나’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원초적인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한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욕망이야말로 삶을 지속하는 조건이고 미래를 향해서 나가도록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욕망이 긍정과 부정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은 삶을 지속하고 자신을 보존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에 고통과 상처를 남기고 삶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래서 욕망하는 방식에 따라서 삶은 달라진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우리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른다. 욕망은 무엇이며, 왜 우리의 삶의 중심에 욕망이 있는 것일까?

사실 욕망의 의미는 욕망에 대한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 욕망을 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하던 시대에는 욕망은 감시와 처벌의 영역이었다. 또한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좇거나 추구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동서를 막론하고 지탄과 비난을 받았고, 집단으로부터 소외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욕망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한다. 그는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며, 모든 욕망의 근원은 자기 보존의 욕망, 즉 코나투스라고 말한다. 그래서 욕망은 단순하게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대상을 획득하거나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맹목적인 충동이 아니라고 보았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기 보존의 욕망은 적극적으로 대상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진 능동과 긍정의 힘이다.

다시 말하자면 욕망은 대상이 좋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하기 때문에 욕망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욕망이 스스로 욕망의 대상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다. 즉 이성은 욕망을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억압할 수도 없다.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온 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비판하고 욕망이 가지고 있는 주체적인 긍정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개인의 순간적이고 쾌락적 만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성하고 활동하는 욕망을 의미하며, 삶의 낡은 형식을 넘어서 경계를 확장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욕망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 삶이 아니고, 욕망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지배하는 능동적 삶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욕망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모두가 비슷해 보이고, 모두가 같은 것을 소비하며 같은 것을 욕망하는 세상에서 나의 욕망은 정말 ‘나의’ 욕망일까? 지나친 경쟁과 소모품의 삶을 사는 현대 사회의 개인은 항상 자신에게서 결핍을 느끼고,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이 되고자 하는 자기 초월을 욕망한다. 자신의 진정한 욕망의 소리를 듣거나 생각하고 돌볼 여유가 없다.

이러한 현대인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 현대의 욕망 구조를 삼각형의 욕망이라고 하는데, 이는 르네 지라르라는 프랑스 학자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서 아름다운 얼굴에 대한 욕망은 특정한 연예인의 모습에 대한 욕망으로 매개되고,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성형 수술을 받음으로써 욕망을 충족한다. 또는 광고에 나온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광고 속의 연예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인의 욕망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아니고 매개체를 통해서 암시된 가짜 욕망이다. 가짜 욕망은 매개체가 달라지면 다시 달라지는 모방된 욕망이고, 욕망의 욕망이다. 한 번의 성형 수술이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욕망의 삼각형은 타자의 삶에 기생하는 부정적인 욕망의 구조이다. 이러한 삼각형의 욕망은 끝없이 반복되고 증식될 뿐, 결코 생성하는 힘으로 변화하지 않는 허무하고 공허한 욕망이다. 나가서 자기를 파괴하고 위축시키는 가짜의 욕망이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일수록 가짜 욕망의 힘은 거세다. 이러한 가짜 욕망이 위험한 것은 욕망의 대상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짜 욕망은 가짜 가치를 확산하며, 가짜의 ‘나’를 양산한다.

결국, ‘나’의 욕망에 대한 성찰은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 ‘나’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보존의 근본적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