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호의 키워드로 읽는 광주·전남 미술사] 허련 ‘간결함의 미학’ 여유 넘치는 ‘남도 정서’와 교감
(5) 소치 묵화에서 본 호남 남화의 남도성
허련, 해남 녹우당 윤두서 유묵으로 서화 기초
스승 초의선사·추사 김정희 선생 가르침 큰 영향
상징적 산수 풍광·암시적 인적 등 함축 화법 매력
호남남화, 농본시대 자연 친화·감흥의 문화 배어
토착 문화 같은 친밀감 생성…지역문화 근간 이뤄
허련, 해남 녹우당 윤두서 유묵으로 서화 기초
스승 초의선사·추사 김정희 선생 가르침 큰 영향
상징적 산수 풍광·암시적 인적 등 함축 화법 매력
호남남화, 농본시대 자연 친화·감흥의 문화 배어
토착 문화 같은 친밀감 생성…지역문화 근간 이뤄
![]() 소치 허련 ‘선면산수도(雲林閣圖)’, 1866년 |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때 호남 미술계는 한국화, 특히 호남남화 화풍이 전통적 지역양식으로 대세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호남남화가 지역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은 조선 말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으로부터다. 앞서 한국 미술사에서 비중 있는 조선 중기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 일가가 있지만 손자 이후 화맥이 계속 이어지지 못했고, 그만큼 소치와의 사이에 공백이 커서 호남 근·현대기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소치는 그 자신의 회화세계도 훌륭했지만, 자자손손 가맥이 이어지고, 제자에 제자들을 계속 배출하면서 널리 퍼지다 보니 호남남화의 종주처럼 자리하게 된 것이다. 많이 퍼져 흔히 접할 수도 있지만 지역민들이 토착문화처럼 호남남화를 친숙하게 여기게 된 매력은 무엇일까. 그 연원을 소치 허련의 회화에서 잠시 되짚어본다.
◇문기 품은 소치 회화의 배경
소치 허련은 문인이었던 공재와 달리 직업화가였다. 한양에서 천리 먼 길 떨어진 귀양지 섬 출신이 어떻게 한 시대를 풍미하는 당대 최고 ‘해동 제일’의 화가에까지 이르렀을까.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과 열의, 서화의 수준, 시대 운, 인맥들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조선말의 특출한 지식인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데다, 영의정 권돈인의 집에 머물기도 하고, 흥선대원군이나 민영익 등 당대 권문세가 명사들과 어울렸으며, 헌종 어전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니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소치가 이러한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청년 시절에 해남 녹우당에서 공제의 화격 있는 유묵으로 일찍이 좋은 서화에 눈을 뜨게 된 것과 더불어 스승 초의선사(1786~1866)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적극 후원과 정신적 가르침이 큰 뒷받침이었다. 공재의 고금을 아우르는 여러 화풍 가운데는 공재 시기만 해도 새로운 문기(文氣)의 신 화풍이던 초기 남종화의 모색도 포함되어 있고, 공재가 참고했던 남종화의 교본 ‘고씨화보(顧氏畵譜·1603년 명나라 말 저술)를 따라 화업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초의선사는 다도(茶道)를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은 선(禪) 수행자로서 인식의 일체 경계를 끊어내고 조금도 분별하거나 헤아림이 없이 세상 사물 현상의 본질을 깊이 간파하는 ‘지관(止觀)’을 중시하였다. 이는 소치 회회에서도 산수경물 화재의 감각적 외적 형상보다는 그 본체를 꿰뚫어 보고 최소한의 필치로 함축해서 간일하게 담아내도록 이끌어주었다. 초의선사 소개로 사제의 연을 맺게 된 추사 또한 연경(燕京)을 오가며 옹방강과 완원 등 중국 명유들과 교분을 쌓고 역대 좋은 서화들을 접하면서 깨친 안목과 화론으로 소치를 비롯한 조희룡, 이하응, 전기 등 조선 말의 많은 문인, 서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을 품고 이를 ‘문자향’과 ‘서권기’로 녹여내야 한다는 고전적 정신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치는 스승 추사를 통해 중국의 이름난 남종문인화가들의 작품을 직관하고 그들의 화론과 필묵의 특징을 익혔다. 그러면서 중국 남종문인화의 종조로 불리는 당나라 왕유(王維)의 호 마힐(摩詰)을 자로 쓰거나, 유(維)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고, 원나라 말기에 초야에 묻혀 지낸 남종화의 중흥조 4대가를 정신적 종사로 여겨 대치 황공망에게서 소치(小痴)라는 호를, 운림 예찬(雲林 倪瓚)에게서 운림산방 당호를 따올 정도였다. 소치는 추사의 덕분에 이들 대가들과 당·송, 명·청대의 뛰어난 작품들을 접하고 임모하거나 방작하며 화격을 높였다. “그림을 배우는 사람은 고금의 명가가 남긴 자취를 논하여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나서 붓을 들고 종이를 펴 막힘없이 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평온한 자연 교감의 남도 정서
소치의 묵화들 가운데는 특히 문기를 품은 남종화 계열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문기(文氣)’란 대개 운필 용묵법 같은 손재주와 꾸밈보다는 높은 학문과 정신적 수양에서 배어나는 지적 고아함과 그윽한 품격을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주류양식으로 자리한 안견파 화풍은 중국 북송 때의 이성·곽희·범관 등 북종화 계열에서 연유된 것으로 세필 장엄 고산이 많고, 중기인 17~18세기는 진경산수·풍속화·민화 등 실재하는 현실 소재와 시감각적 표현들이 흥성하던 시기였다. 문인들 중에도 어느덧 고전이 된 안견파나 당대 실경산수를 따랐던 이들이 있었지만, 점차 중국의 왕유와 미불·동원·거연·소식·심주·동기창 등으로 이어지는 문인 취향에 남부지방 배경의 온유한 심상풍경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갔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면서 앞 시대의 고산준령 장대한 산천경계나 직시적 현실감각보다는 문자향과 내면의 의취(意趣)를 중시하는 정신적 고전주의와 상고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소치도 문인 신분은 아니었지만 이런 시대문화를 이끌고 있던 스승 추사의 절대적인 영향과 더불어 주로 어울리는 지식인사회나 접하는 묵적들이 그런 쪽이고, 자신도 또한 남도 출신의 기본정서가 배어 있다 보니 남종화풍을 주로 취하게 되었다.
소치의 ‘연운공양첩(煙雲供養帖)’(전남대학교박물관 소장)은 1846년 헌종께 그려 바쳤던 그림을 후에 다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화첩이다. 여기 한 폭을 예로 들면 소치의 일반적인 화풍대로 소략한 풍경에 넓은 수면공간 여백과 함께 피마준을 주로 써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백에 써넣은 화제에서도 ‘풍경이 적을수록 의미는 유장하고 고졸과 담박(古淡)이 깊어진다’고 지향하는 화론을 피력하였다. 또한, 헌종께 설경을 그려 바쳐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데,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개인소장)도 한자 남짓 눈내린 날에 하얗게 핀 매화를 찾아온 손님을 그린 방우도다. 경물은 줄여 간략히 배치하고 뒤 설산 배경을 담백하고 넓게 그려 시심을 돋우었다.
‘초각산수도(草閣山水圖)’는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자연의 상징적 요체로서 산수 풍광과 암시적 인적만으로 화경을 넓게 품어낸 간일한 화법이다. 한가롭고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먼 수평선과 옆으로 길게 누운 원산, 활기를 불어넣은 근경의 구불거리는 수목과 절벽과 바위들, 엷은 먹과 성근 이파리들, 강가 초옥에서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 선비모습을 담은 소경산수화다. 까실하고 찬 기운이 도는 스승 추사 그림에 비하면 훨씬 편안하고 물기와 살가움을 품은 시정 어린 풍경이다.
회갑을 몇 년 앞두고 진도의 거처를 그린 ‘선면산수도(雲林閣圖)’(1866,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이 같은 시심을 한껏 담아낸 부채그림이다. 첨찰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운림각에 저녁 노을이 물들 즈음 집으로 돌아올 때의 풍경인데, 소치 그림에서는 필묵을 많이 베풀어 화면이 거의 채워진 드문 예다. 또한, 화폭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산과 근경의 큰 바위 등등에 음영을 넣어 덩어리감을 주면서 대칭형 구도로 화경을 펼쳐 두터운 안정감을 준 특별한 작품이다. 넓지 않은 여백에 남송 문인 나대경의 산문집 ‘학림옥로(鶴林玉露)’‘산거’ 편 ‘산정일장(山靜日長)’을 옮겨 적어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서니 석양은 서산마루에 걸려 있고, 자줏빛과 푸른빛이 만가지 형상으로 순간순간 변하며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네’라고 한껏 고양된 시심을 담아 놓았다.
호남남화 화풍이 지역 미술계에 주류로 자리한 것은 단지 오랫동안 많이 퍼져 있었고 흔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생활 가까이했다는 것도 그만큼 지역민과 너른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호남남화는 대개 산천경계의 일부만을 화폭에 옮겨오는 소경산수에 평온한 평원구도가 많고, 간일담백한 담먹에 물맛이 촉촉하면서 간략하게 함축된 필치로 시심을 돋우는 시화일체 그림들을 즐겼다. 이는 조선 중기까지 고전으로 자리한 안견파의 북송계열 북종화풍을 따르는 고산준령 심산유곡 이상향과도 같은 경외감의 산수 자연에 필묵을 많이 올리는 회화 양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만큼 호남남화에는 농본시대 남도의 자연 친화적 환경요소와 여유로운 지역정서, 교감과 감흥의 문화가 배어 있었던 것이다.
조인호 전문가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소치 허련 ‘연운공양첩(煙雲供養帖)’중 일부.(19세기 중엽) |
소치 허련은 문인이었던 공재와 달리 직업화가였다. 한양에서 천리 먼 길 떨어진 귀양지 섬 출신이 어떻게 한 시대를 풍미하는 당대 최고 ‘해동 제일’의 화가에까지 이르렀을까.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과 열의, 서화의 수준, 시대 운, 인맥들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조선말의 특출한 지식인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데다, 영의정 권돈인의 집에 머물기도 하고, 흥선대원군이나 민영익 등 당대 권문세가 명사들과 어울렸으며, 헌종 어전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니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 소치 허련 ‘초각산수도’(19세기 중엽 ) |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치는 스승 추사를 통해 중국의 이름난 남종문인화가들의 작품을 직관하고 그들의 화론과 필묵의 특징을 익혔다. 그러면서 중국 남종문인화의 종조로 불리는 당나라 왕유(王維)의 호 마힐(摩詰)을 자로 쓰거나, 유(維)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고, 원나라 말기에 초야에 묻혀 지낸 남종화의 중흥조 4대가를 정신적 종사로 여겨 대치 황공망에게서 소치(小痴)라는 호를, 운림 예찬(雲林 倪瓚)에게서 운림산방 당호를 따올 정도였다. 소치는 추사의 덕분에 이들 대가들과 당·송, 명·청대의 뛰어난 작품들을 접하고 임모하거나 방작하며 화격을 높였다. “그림을 배우는 사람은 고금의 명가가 남긴 자취를 논하여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나서 붓을 들고 종이를 펴 막힘없이 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진도 운림산방 초옥. <조인호 전문가 제공> |
소치의 묵화들 가운데는 특히 문기를 품은 남종화 계열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문기(文氣)’란 대개 운필 용묵법 같은 손재주와 꾸밈보다는 높은 학문과 정신적 수양에서 배어나는 지적 고아함과 그윽한 품격을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주류양식으로 자리한 안견파 화풍은 중국 북송 때의 이성·곽희·범관 등 북종화 계열에서 연유된 것으로 세필 장엄 고산이 많고, 중기인 17~18세기는 진경산수·풍속화·민화 등 실재하는 현실 소재와 시감각적 표현들이 흥성하던 시기였다. 문인들 중에도 어느덧 고전이 된 안견파나 당대 실경산수를 따랐던 이들이 있었지만, 점차 중국의 왕유와 미불·동원·거연·소식·심주·동기창 등으로 이어지는 문인 취향에 남부지방 배경의 온유한 심상풍경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갔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면서 앞 시대의 고산준령 장대한 산천경계나 직시적 현실감각보다는 문자향과 내면의 의취(意趣)를 중시하는 정신적 고전주의와 상고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소치도 문인 신분은 아니었지만 이런 시대문화를 이끌고 있던 스승 추사의 절대적인 영향과 더불어 주로 어울리는 지식인사회나 접하는 묵적들이 그런 쪽이고, 자신도 또한 남도 출신의 기본정서가 배어 있다 보니 남종화풍을 주로 취하게 되었다.
소치의 ‘연운공양첩(煙雲供養帖)’(전남대학교박물관 소장)은 1846년 헌종께 그려 바쳤던 그림을 후에 다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화첩이다. 여기 한 폭을 예로 들면 소치의 일반적인 화풍대로 소략한 풍경에 넓은 수면공간 여백과 함께 피마준을 주로 써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백에 써넣은 화제에서도 ‘풍경이 적을수록 의미는 유장하고 고졸과 담박(古淡)이 깊어진다’고 지향하는 화론을 피력하였다. 또한, 헌종께 설경을 그려 바쳐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데,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개인소장)도 한자 남짓 눈내린 날에 하얗게 핀 매화를 찾아온 손님을 그린 방우도다. 경물은 줄여 간략히 배치하고 뒤 설산 배경을 담백하고 넓게 그려 시심을 돋우었다.
‘초각산수도(草閣山水圖)’는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자연의 상징적 요체로서 산수 풍광과 암시적 인적만으로 화경을 넓게 품어낸 간일한 화법이다. 한가롭고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먼 수평선과 옆으로 길게 누운 원산, 활기를 불어넣은 근경의 구불거리는 수목과 절벽과 바위들, 엷은 먹과 성근 이파리들, 강가 초옥에서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 선비모습을 담은 소경산수화다. 까실하고 찬 기운이 도는 스승 추사 그림에 비하면 훨씬 편안하고 물기와 살가움을 품은 시정 어린 풍경이다.
회갑을 몇 년 앞두고 진도의 거처를 그린 ‘선면산수도(雲林閣圖)’(1866,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이 같은 시심을 한껏 담아낸 부채그림이다. 첨찰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운림각에 저녁 노을이 물들 즈음 집으로 돌아올 때의 풍경인데, 소치 그림에서는 필묵을 많이 베풀어 화면이 거의 채워진 드문 예다. 또한, 화폭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산과 근경의 큰 바위 등등에 음영을 넣어 덩어리감을 주면서 대칭형 구도로 화경을 펼쳐 두터운 안정감을 준 특별한 작품이다. 넓지 않은 여백에 남송 문인 나대경의 산문집 ‘학림옥로(鶴林玉露)’‘산거’ 편 ‘산정일장(山靜日長)’을 옮겨 적어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서니 석양은 서산마루에 걸려 있고, 자줏빛과 푸른빛이 만가지 형상으로 순간순간 변하며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네’라고 한껏 고양된 시심을 담아 놓았다.
호남남화 화풍이 지역 미술계에 주류로 자리한 것은 단지 오랫동안 많이 퍼져 있었고 흔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생활 가까이했다는 것도 그만큼 지역민과 너른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호남남화는 대개 산천경계의 일부만을 화폭에 옮겨오는 소경산수에 평온한 평원구도가 많고, 간일담백한 담먹에 물맛이 촉촉하면서 간략하게 함축된 필치로 시심을 돋우는 시화일체 그림들을 즐겼다. 이는 조선 중기까지 고전으로 자리한 안견파의 북송계열 북종화풍을 따르는 고산준령 심산유곡 이상향과도 같은 경외감의 산수 자연에 필묵을 많이 올리는 회화 양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만큼 호남남화에는 농본시대 남도의 자연 친화적 환경요소와 여유로운 지역정서, 교감과 감흥의 문화가 배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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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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