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자연이 건네는 말’] 스라소니가 사라졌다
![]() |
“시라소니.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뜻이다. 과거 낭만파 주먹 시대에 있어서 이 사람보다 더 싸움을 잘하는 이는 없다고 전해져 온다. 중국 전역을 떠돌며 수 많은 강적들을 주먹으로 눕혔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타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SBS의 ‘야인시대’는 2002~2003년 한국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다. 53화에 시라소니가 처음 등장할 때 흘러나온 나레이션 첫머리다. 시라소니는 실존 깡패 이성순의 별명이다. 드라마에서는 도움닫기 박치기인 공중고리와 달리는 열차를 자유자재로 타고 내리는 기술이 특기로 나온다.
야인시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깡패들을 멋지게 그린 드라마였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깡패들이 항일 투쟁을 했다는 것처럼 미화한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한국 깡패가 일본 깡패와 맞장을 뜨기야 했겠지만 어차피 한국 양민들의 등을 쳐먹던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드라마 야인시대를 바탕으로 만든 어린이용 만화책이 불티나게 팔렸는데 그 만화책을 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아찔했다.
시라소니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밀수꾼 이미지이지만 드라마에서는 김두한과 동급의 싸움꾼으로 나온다. 그를 독립운동가로 미화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만 이북 출신 잔혹한 조폭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5·16 쿠데타 후 조직폭력배를 일제 검거할 때 시라소니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드라마의 인기는 접어두고 시라소니가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나레이션은 첫 문장부터 틀렸다. 시라소니의 표준어는 스라소니다. 학명은 Lynx lynx. 고양잇과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밤에 눈이 반짝이는데 이 특성을 표현한 이름이다. 스라소니는 북부 유라시아에 넓게 분포하는 중간 크기 고양잇과 동물이다. 못나지도 않았다.
스라소니는 북쪽 숲의 침묵이 낳은 야수다. 은빛 겨울 햇살을 머금은 듯한 회갈색 털은 숲의 그늘 속에 연기처럼 스며들고, 두 귀 끝에 솟은 검은 털 뭉치는 바람이 흐르는 방향을 가리키는 촉수 같다. 마치 얼음 속에 박힌 황금 구슬 같은 눈에는 수천 년의 추위와 기다림이 응축된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어쨌든 그 시라소니 말이야, 정말로 끝내주더구먼. 이거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날짐승을 보는 것 같았어. 이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이쪽으로! 공중을 픽픽 날라댕기는데! 야~ 이건 정말이지 환상이었어, 환상.”
드라마에 등장하는 또 다른 깡패 임화수가 한 말이다. 실제로 스라소니가 그렇다. 어깨를 낮게 깔고 눈 속을 유영하듯 긴 다리로 걸음을 옮긴다. 앞다리보다 긴 뒷다리로 켱쾌하게 걸으면서 눈길 위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으려는듯 가볍게 걷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번에 사슴의 목을 꿰뚫을 만큼 정확하게 달려든다. 스라소니의 가장 큰 특징은 고요함이다. 으르렁대지 않는다. 단지 거기에 있을 뿐이다.
스라소니는 주로 고도가 높고 바위가 많은 산림에 서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백두대간을 따라 함경도에서 강원도까지 분포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분류상 관심대상종(Least Concern, LC)으로 평가되지만 국내에서는 사실상 멸종된 종이다. 과거 수렵 기록과 민간전승에서도 등장하지만 1960~70년대 이후에는 실제로 잡았다거나 관찰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스라소니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로는 서식지 파괴와 무분별한 밀렵이 꼽힌다. 백두대간 일대 개발과 산지 훼손, 수십 년 전까지 이어진 모피 채취를 위한 포획 등이 결정타였다. 그래도 의문이다. 스라소니는 중상위 포식자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호랑이 같은 상위 포식자는 물론 늑대 같은 경쟁 동물도 어차피 사라진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야생 고양잇과 동물은 삵이 유일하다. 아마도 서식지 감소와 함께 사냥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라소니 멸종은 한반도 생물 다양성의 축소를 상징하는 또다른 사례다. 종다양성을 걱정하는 이들은 유럽과 러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스라소니를 국내 도입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과연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생태계는 여전한데 억지로 가져다 놓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생태계 충돌과 유전적 이질성 같은 문제가 있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깡패 이성순이 처음 등장하면서 그는 자신을 한 문장으로 보여주는 근사한 대사를 날렸다. “내래? 시라소니야!” 이렇게 폼나게 스라소니가 한국 자연에 살아 돌아올 일은 없다.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SBS의 ‘야인시대’는 2002~2003년 한국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다. 53화에 시라소니가 처음 등장할 때 흘러나온 나레이션 첫머리다. 시라소니는 실존 깡패 이성순의 별명이다. 드라마에서는 도움닫기 박치기인 공중고리와 달리는 열차를 자유자재로 타고 내리는 기술이 특기로 나온다.
드라마의 인기는 접어두고 시라소니가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나레이션은 첫 문장부터 틀렸다. 시라소니의 표준어는 스라소니다. 학명은 Lynx lynx. 고양잇과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밤에 눈이 반짝이는데 이 특성을 표현한 이름이다. 스라소니는 북부 유라시아에 넓게 분포하는 중간 크기 고양잇과 동물이다. 못나지도 않았다.
스라소니는 북쪽 숲의 침묵이 낳은 야수다. 은빛 겨울 햇살을 머금은 듯한 회갈색 털은 숲의 그늘 속에 연기처럼 스며들고, 두 귀 끝에 솟은 검은 털 뭉치는 바람이 흐르는 방향을 가리키는 촉수 같다. 마치 얼음 속에 박힌 황금 구슬 같은 눈에는 수천 년의 추위와 기다림이 응축된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어쨌든 그 시라소니 말이야, 정말로 끝내주더구먼. 이거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날짐승을 보는 것 같았어. 이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이쪽으로! 공중을 픽픽 날라댕기는데! 야~ 이건 정말이지 환상이었어, 환상.”
드라마에 등장하는 또 다른 깡패 임화수가 한 말이다. 실제로 스라소니가 그렇다. 어깨를 낮게 깔고 눈 속을 유영하듯 긴 다리로 걸음을 옮긴다. 앞다리보다 긴 뒷다리로 켱쾌하게 걸으면서 눈길 위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으려는듯 가볍게 걷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번에 사슴의 목을 꿰뚫을 만큼 정확하게 달려든다. 스라소니의 가장 큰 특징은 고요함이다. 으르렁대지 않는다. 단지 거기에 있을 뿐이다.
스라소니는 주로 고도가 높고 바위가 많은 산림에 서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백두대간을 따라 함경도에서 강원도까지 분포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분류상 관심대상종(Least Concern, LC)으로 평가되지만 국내에서는 사실상 멸종된 종이다. 과거 수렵 기록과 민간전승에서도 등장하지만 1960~70년대 이후에는 실제로 잡았다거나 관찰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스라소니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로는 서식지 파괴와 무분별한 밀렵이 꼽힌다. 백두대간 일대 개발과 산지 훼손, 수십 년 전까지 이어진 모피 채취를 위한 포획 등이 결정타였다. 그래도 의문이다. 스라소니는 중상위 포식자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호랑이 같은 상위 포식자는 물론 늑대 같은 경쟁 동물도 어차피 사라진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야생 고양잇과 동물은 삵이 유일하다. 아마도 서식지 감소와 함께 사냥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라소니 멸종은 한반도 생물 다양성의 축소를 상징하는 또다른 사례다. 종다양성을 걱정하는 이들은 유럽과 러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스라소니를 국내 도입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과연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생태계는 여전한데 억지로 가져다 놓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생태계 충돌과 유전적 이질성 같은 문제가 있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깡패 이성순이 처음 등장하면서 그는 자신을 한 문장으로 보여주는 근사한 대사를 날렸다. “내래? 시라소니야!” 이렇게 폼나게 스라소니가 한국 자연에 살아 돌아올 일은 없다.
<전 국립과천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