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냉방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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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냉방의 추억
2025년 07월 31일(목) 00:20
연일 폭염이다. 생애에 이런 날씨는 없었다. 문제는 발표하는 기온과 체감이 다르다는 점이다. 도시는 에어컨 실외기의 열풍과 자동차 열기가 더해지고, 다른 지역은 냉방 공유력이 떨어진다. 냉방 공유력은 내가 만든 말이다. 공공 또는 상업지구에서 제공되는 냉방의 혜택을 시민들이 나눠 받는다는 의미다.

옛날에 너무 더운 날에는 동네에 갓 생기기 시작한 은행에 갔다. 다른 공공기관에는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유독 시중 은행의 지점에는 넉넉하게 냉방을 돌렸다. 은행인지라 오는 손님 눈치주지 않는 분위기라서 동네 꼬맹이들도 장내에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 잠깐이나마 그 문명의 바람을 쐬었다. 십원짜리 예금도 하지 않으면서. 아마도 오래된 냉방 공유의 현장이었을 것 같다.

냉방을 공유하는 건 대체로 도시가 유리하다. 집밖은 촘촘한 냉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철과 여러 쇼핑 시설, 풍부한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냉온방이 완벽한 카페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다. 게다가 도서관 같은 공공시설도 시원하게 책 읽거나 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런 냉방의 힘은 결국 열기를 다시 도시에 뱉어낸다. 그 더위를 식히기 위해 다시 에너지를 가동해서 찬 기운을 만들어낸다. 악순환이다.

에어컨 밖으로 나와서 거리에 잠깐 서 있어보면, 지구의 미래를 아주 잔혹하게 예측하는 게 어렵지 않다. 이렇게 전기를 써대고, 냉방을 팡팡 돌려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래 세대에게 지구를 남겨줄 수 있을까. 두렵다.

어렸을 때는 더우면 더운가 보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그럭저럭 잘 견뎠다. 에어컨에 선풍기가 몇 대고 돌아가는 집이 흔한 요즘이지만 과거에는 달랑 선풍기 한 대로 온 식구가 살았다. 회전하고 있는 선풍기 날개를 따라 몸을 움직여가던 기억도 있지 않은가. 펌프물로 등목을 하고 수박을 자르고 미숫가루를 타서 먹었다. 미제장수가 파는 오렌지가루 주스도 만들었고.

그 무렵에 보급되기 시작한 냉장고의 자그마한 냉동실에서 얼던 얼음이 왜 그리도 반가웠던지. 그런 냉장고도 없으면 스티로폼으로 만든 아이스박스를 집집마다 놓고 썼다. 겨울엔 석유, 여름엔 얼음을 파는 가게들이 골목에 있었다. 아저씨가 톱으로 썩썩 썰어주는 얼음을 묶어서 얼굴이 열기로 달아오르는 줄도 모르고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 얼음은 아이스박스에 들어가서 반찬이 상하는 걸 막아주기도 했고, 더러는 수박화채도 되고, 봉지 냉면이나 냉국수 만드는 데 쓰기도 했다.

펌프로 뽑아올린 물은 안 그래도 차가웠는데 얼음 조각을 깨어 넣고 국수라도 말면 왜 그리도 얼얼하게 차갑고 맛있었는지. 열무 국수도 좋았고, 미역과 식초를 풀어 만드는 냉국에 소면을 삶아 말기도 했다.

아, 콩국수도 있었지. 믹서라는 게 막 보급되던 시기였던 때라 어머니는 무엇이든 그 문명의 이기를 써서 갈아보는 게 아주 재미있으셨을 거다. 여름 콩국수가 딱 그랬다. 맷돌이 아니면 못 먹던 콩국수를 손쉽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 동네 국숫집에서 굵직한 우동면을 사고 소금 뿌려서 콩국을 갈아 한여름을 넘겼다. 토마토 한 쪽과 여름이 깊어 이미 늙어가는 오이채가 반듯하게 올라가 있던 콩국수는 수수하면서도 단정했다.

그 여름의 기억이 수채화처럼 또렷하다. 이제 그런 여름은 없는 것인지. 냉방 공유도 안되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 에어컨에서도 소외된다. 이를 냉방 소외라고 해야 할 듯하다.

7월 더위는 사실 서막이고 이제 진짜 더위가 온다. 또 한 해 견디고 살아보자. 또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사람이 아닌가. <음식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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