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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사죄 - 정근식 서울대 명예교수
2023년 08월 29일(화) 00:00
사람의 마음은 여러 가지이다. 욕심도 있고, 양심도 있다. 욕심은 손익을 판단하고, 양심은 선악을 판단한다. 욕심이 과도하면 사심이 생기고 흑심도 생기지만, 양심은 언제나 진실에 겸허하다. 양심은 법률적 용어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이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사람들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탱하는 내면의 외침, 이것은 현재의 삶 뿐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작동한다. 양심은 집단적으로 조직화되어 사회의 품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전주화약이후 동학농민군이 고향으로 흩어진 상태에서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군은 1894년 7월 23일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볼모로 잡았다. 그 직후에 일본군은 풍도해전과 성환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청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9월에는 평양전투와 황해 해전에서 승리하고, 10월 24일 압록강을 넘어 청군을 추격하였다. 바로 그때 동학농민군이 다시 봉기를 하였는데, 일본 대본영은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의 명의로 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용산에 도착한 이들은 조선 관군을 휘하에 두고 11월 12일부터 3개 부대로 나누어 대구, 청주, 전주를 향해 남진했고, 이 중 한 개 중대가 11월 25일 공주 우금치에서 농민군과 부딪쳤다. 공주와 연산에서 3만 명의 농민군이 처절한 패배를 당했는데, 바로 그 무렵에 요동반도의 끝 뤼순에서도 청의 병사와 백성들이 무차별 살육을 당했다. 이른바 뤼순대학살이다.

일본군 제19대대는 1895년 1월 5일 나주에 입성하여 토벌사령부를 차렸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를 뺏기고 객사 옆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은 서남해안으로 내몰린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다시 3개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했고, 닷새 후에 장흥 석대들에서 수많은 농민군을 학살했다. 이 부대의 병사였던 쿠스노키 비요키치(楠美代吉) 상등병은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다음은 1월 31일의 상황이다.

“해남(海南)에 체재하다. 이날 동도(東徒) 가운데 남아 있던 자 7명을 잡아와서 그들을 성 밖 밭 가운데 일렬로 나란히 세우고 총에 착검한 후 모리타(森田近通) 1등 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돌격하여 찔러 죽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조선 사람들과 통위영 병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몹시 경악하였다.”

이들은 2월 4일 나주로 돌아왔는데 이들을 맞이한 것은 성내에 첩첩이 쌓인 농민군의 시신들이었다. “남문(南門)에서 약 400미터(4丁) 남짓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다. 시체가 실로 산을 이루었다. 이것은 장흥부 전투 후에 수색이 삼엄했기 때문에 갈 곳이 없게 된 동학농민군이 조선의 민병이나 우리 병사에게 포획되어, 고문당하고 중죄인으로 살해되었는데, 매일 12명 이상 103명에까지 이르렀다. 이곳에 버려진 시체가 680명에 달했다.”

일본군들은 임무를 마치고 2월 8일 나주를 떠났다. 스산한 겨울바람이라도 이들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

2008년 그 부대의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남긴 문서들이 공개되었다. 이를 통하여 나주에 서남해안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던 일본 정토군 본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노우에 카츠오 교수가 2012년에 발굴한 쿠스노키의 ‘종군일지’를 통해 나주의 전라 우영 일대에서 수많은 동학지도자들이 학살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20여 년전의 일본과 조선 관계사의 진실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친 ‘일본의 양심’,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와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군의 학살에 대하여 통절한 사죄의 마음으로 위령비를 세울 것을 제안했고, 나주시와 한국의 연구자들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들은 오는 10월 나주에 사죄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일본군 만행의 현장이자 수성군과 농민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장소에 건립될 이 비가 미래의 평화와 상생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란다. 점점 엄중해지고 있는 국내외 정세, 새로운 군사동맹이나 지구적 해양오염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국가간 약속이나 과거사에 관한 사죄나 용서 모두가 굳건한 시민적 합의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