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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리안치와 신중년의 삶
2021년 01월 20일(수) 09:00
이병우 우아포인트 대표
코로나19로 인해서 위리안치(圍籬安置)란 말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자가 격리가 현대판 위리안치라는 것입니다. 위리안치가 어떤 형벌입니까? 조선시대에 중죄인에게 내린 형벌로, 집 주위를 가시나무로 둘러쌓아 외부와 차단해서 유배자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습니다. 먹을 것만 조그만 구멍으로 넣어 주었습니다. 14일간의 외부 격리도 힘든데 기약 없는 위리안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연산군·중종 때의 인물인 이행은 위리안치 중일 때의 심정을 ‘해도록’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가시나무로 사방을 둘러 배 안에 있는 듯하나/ 탱자나무로 거듭 에워싸 하늘도 보이지 않네/ (…)/ 산가지 세며 책 읽은들 종내 어디에 쓰겠는가?/ 세상사 험한 길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네” 이 시구 중에서 “책을 읽은들 종내 어디에 쓰겠는가?”라는 구절이 절절하게 끌립니다. 이제 배우고 깨달은 것이 쓸데가 없다고 느낄 때의 무력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퇴 후 신중년의 삶은 어떠할까요? 자칫하면 위리안치와 같은 처지가 되지는 않을까요? 사회적 활동과 경제적 활동의 단절, 거기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이 위리안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해 11월 서울시에서 발표한 서울시민의 연령에 따른 행복도를 보면, 나이가 들수록 하향 곡선을 긋고 있습니다. 다른 기관의 조사에서도 같은 성향을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세계 8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나이별 행복지수를 보면 U자 곡선을 보입니다. 44세를 최저점으로 다시 우상향 곡선입니다. 믿지 어렵겠지만 70대엔 20대 못지않은 행복도를 보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유독 신중년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의 신중년은 자아 정체성과 역할 부재에서 오는 갈등 때문이라는데 다른 나라에선 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조사한 신중년의 만족스러운 삶의 조건을 보면 첫째 인식의 전환과 내려놓기, 둘째 존재감의 회복, 셋째 쓸모 있음의 재정립을 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조직 안에서 올라가는 방법만 추구하다가 조직 밖으로 나왔으니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입니다. 조직인으로 최적화된 탓에 자유인의 삶은 주체하기가 어려워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최근 대기업 퇴직자를 대상으로 한 멘토 양성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워크숍 주재 기관 대표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역일 때 그렇게 출중한 역량을 자랑하는 인물들이 은퇴 후에 지내는 모습은 대개 세 가지라는 겁니다. 골프를 치거나 등산, 그리고 스마트폰에 있는 손주 자랑하기라고 합니다.

조사 자료에 의하면 베이비 부머 세대가 선호하는 상위 활동은 멘토링을 비롯한 교육 서비스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고경력자들을 바로 멘토로 투입하면 사달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스템이 갖추어진 조직에서 일하다 초기 창업자들을 보면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젊은 창업자와 마찰을 빚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어깨에 힘 빼는 데 적어도 2년은 걸리는 것 같습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60세에 사회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75세까지 성장한다고 했습니다. 그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로 책도 그때 쓴 것이 가장 좋았다면서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인식의 전환과 쓸모의 재정립만 할 수 있으면 위리안치의 위협은 얼마든지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의 연령별 행복지수도 U자를 그릴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