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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향교’를 유교문화 특구로
2020년 04월 27일(월) 00:00
[박 석 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조선 500년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교 국가였다. 유학을 진작시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위대한 예의 국가이자 도덕 국가를 구현해 내자는 것이 통치의 목표였다. 그래서 서울 문묘(文廟)에는 성균관이 세워졌다. 전국의 모든 고을에는 유학을 가르쳐 선비를 양성하는 학교인 향교(鄕校)를 세웠다.

호남의 웅도(雄都) 광주에는 광주향교(光州鄕校)가 세워졌다. 조선 초기 처음 향교가 세워진 곳은 무등산 자락의 장원봉 아래였으나, 성종 19년(1488) 큰 홍수로 인하여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대문호요, 대제학을 지낸 허백당 성현(成俔;1439-1504)이 61세 되던 1500년에 지은 ‘광주향교중수기’라는 글에 보인다. 당시의 현감(牧使라는 호칭도 있음) 권수평(權守平)이라는 어진 수령이 장원봉 아래서 읍내로 옮긴 향교가 적당한 장소가 아니어서 읍내에서 서쪽 이리(二里:지금의 향교 위치)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몸소 유생들을 인도하여 경학을 담론했다”(親引儒生 談論經學)라고 해서 본격적으로 유교 학문의 강학이 이뤄졌음을 알게 해 준다. 향교의 규모도 자세히 설명했다. “대성전에 공자와 공문 십철(十哲), 70자(七十子)를 모셨으며 대성전 앞에 명륜당을 세워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동과 서에 집을 지어 동쪽은 교관(敎官)들이 거처하고 서쪽은 이름을 사마재(司馬齋)라 하여 고을의 생원·진사들이 학문을 연마하게 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밖의 부속건물까지 합하면 무려 50여 칸이나 되는 장대한 모습의 향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결과 문풍(文風)을 크게 떨치고 덕교(德敎)가 더욱 밝아졌으며 고을의 우수한 인재들이 그곳에 노닐며 덕성을 도야하고 행실을 닦아 광주향교는 모든 향교 중 으뜸의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성현 이후로 광주와 호남 출신의 대학자들 모두가 광주향교에 대한 글을 남겼다. 광주 출신 조선의 대학자 고봉 기대승은 1563년 ‘대성전중수상량문’과 ‘광주향교중수기’를 지어 권수평의 훌륭함을 칭송했다. 또한 “학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인륜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인륜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면 국가가 의뢰하여 유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향교의 강학이 왕성해져야만 인륜이 밝혀져 문화와 문명국가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회재 박광옥(朴光玉)은 당대 광주의 큰 학자로 음기(陰記)를 지어 광주향교의 우수함을 칭송하였다. 영광 출신으로 대표적인 유학자인 수은 강항(姜沆) 또한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광주향교 복원 상량문에서 눌재 박상(朴祥)·고봉 기대승 같은 광주 출신 대학자들이 광주가 배출한 인물로 광주향교의 교화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기대승의 7대 후손인 겸재 기학경(奇學敬)은 문과 급제로 홍문관 교리에 오른 당대의 학자로 ‘광주향교중수기’를 지어 향교의 역할을 논했다. 조선 최고이자 대표적 성리학자인 장성 출신 노사 기정진(奇正鎭)은 1854년 중수한 새로운 향교에 ‘광주문묘중수기’를 지어 “오늘날 광주는 선현의 유풍이 있고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어 호남의 으뜸 고을이 되었다”라는 칭송을 바쳤다. 광주향교는 대단한 향교다. 조선의 석학들이 시대별로 놓치지 않고 향교에 대한 희망과 소원을 말했다. 성현·기대승·박광옥·강항·기학경·기정진. 그들이 누구인가?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들 아닌가. 이들이 모두 광주향교에 대한 글을 남긴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의 ‘흥학’(興學) 편에서 권수평을 칭찬하면서 광주향교를 찬양했다. “권수평으로 인하여 유풍이 크게 진작되고 문교(文敎)가 더욱 밝아졌으며, 단정하고 발전한 선비들을 골라 교관으로 삼아 학생들을 통솔케 하여 예의 바르게 가르쳐 주니 생도들이 염치(廉恥)를 기를 줄 알았다”(由是儒風大振 文敎益明 簡選端方 使爲齋長 以作表率 待之以禮 養其廉恥) 광주향교가 호남의 상징적인 향교로 그곳을 통해 호남인들이 예의 바르고 염치를 아는 훌륭한 선비의 고을로 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오늘의 세상. 50칸이 넘는 광주향교를 예전대로 복원하여 유교 문화의 전당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효제충신의 인륜 도덕이 살아나고, 부끄러움과 염치를 알아 도덕적인 인간이 양성될 수만 있다면, 그때에는 참으로 이 나라가 문화와 문명국이 되지 않겠는가.

성현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자. 동재와 서재는 대학생들의 연구실이라면, 사마재는 진사·생원, 즉 대학원생들의 연구실이었다. 흔적도 없는 사마재를 복원해서 수준 높은 유학 공부를 다시 이어갈 수 있게 한다면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향교가 될 것인가. 광주향교를 유교문화 특구로 지정해서, 이제라도 타락한 속세의 도덕성을 살려 내는 일에 행정 당국이 앞장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호남인들의 시대적 과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