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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포럼-성염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 아직도 8월
2019년 08월 27일(화) 04:50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문구, 웬만한 지식인이면 들어서 아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명제가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시국이다. 어떤 사람이 흔히 쓰는 단어와 어법과 어조는, 그 사람의 지적 능력과 지식수준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정신적 혈통과 종족, 사람됨, 그가 사는 세계를 결정(結晶) 짓는다는 뜻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는 아직도 8월이다. 1945년의 8월에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이웃, ‘한 나라에는 해방의 빛이 비치고, 다른 한 나라에는 패전의 어두움’이 드리웠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건은 미·소에 의한 남북 분단과 6·25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는 폐허’로 변했고, 동서냉전의 전장에서 미국의 동맹국이 된 ‘일본은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21세기에 들어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으로 한반도 군사 대결의 긴장이 완화되고 문재인 대통령의 북미회담 주선과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한의 화해와 재도약의 시기가 다가오나 싶었다. 그런데 동맹이라고 여겼던 일본의 난데없는 ‘경제침략’으로 한국은 등에 칼을 맞았다. 2019년 8월에!

최근 아베 측근들은 ‘정한’(征韓)이라는 말까지 입에 올린다니 우리 국민에게는 ‘기해왜란’(己亥倭亂)이 일어난 셈이다. 한편 ‘토착왜구’라는 신조어가 조롱하듯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커밍아웃을 기웃거리던 친일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이름을 올린 자가 4000여명, 계속 조사 받는 인사들이 4만여 명이라 하니 한반도 일본강점 36년의 혹독함이 묻어난다.

지난,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밝혔다.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匪賊)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진짜 공산주의자에게만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까지 모든 독립운동가를 낙인찍는 말이었습니다. 좌우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친일 청산을 가로막는 도구가 됐습니다. 양민 학살과 간첩 조작,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도 국민을 적으로 모는 낙인으로 사용됐습니다.”

민주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용인되고 “표현의 자유란 우리가 동의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이다”라는 교훈도 있다. 하지만 한국 땅에 살면서, 일제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애국지사들에게, 해방 후 두 차례 군사반란에 맞서 인권과 민주를 수호한 투사들에게,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민주정권에 ‘빨갱이’ 또는 유사 언어를 함부로 덧씌우는 사람은, 그가 언론인이든 정당인이든 종교인이든, 학자든 공무원이든 기업가든, 한반도 민족사의 급류를 기운차게 거스르며 자기 혈통 속에 도도히 흐르는 ‘아버지의 나라’를 향해 헤엄쳐 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1 운동 100주년이란 뜻 깊은 날에 무슨 난데없는 친일·빨갱이 타령이냐?”(조선), “빨갱이란 용어 자체가 설사 일제의 독립운동가 탄압 과정에서 생겨났다 해도”(중앙),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를 수 없는 나라는 북한과 다름없는 전체주의 국가다”(동아)라는 즉각적 논평은 문 대통령의 연설이 정확했음을 되씹게 했다. 쉽게 배우는 욕설처럼 누구에게나 생각 없이 ‘빨갱이’라 내뱉어 온 이들이 제발 정신을 가다듬고, 되도록 그 말을 입에 안 올리기 바란다. 발설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내 인생에 영구히 깃들어 자자손손 숨 쉬고 머물러 살 집을 엮어 간다는 이치를 이미 알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