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지닌 두 얼굴과 법기술 -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
또 한 해가 저문다. 작년 이맘때에 느꼈던 황당함과 비감함이 다소 옅어졌지만 여전한 아쉬움과 함께 여러 의문이 남아있다. 그래도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저력과 회복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런 시간이었다. 위헌·위법한 12·3 비상계엄이 있고서 1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런데도 내란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1심 판결이 여태껏 없는 가운데 법정과 국회 일각 그리고 길거리에서 비상계엄이 정당했다는 주장이 여전히 난무한다. 심지어는 내란몰이라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궤변도 서슴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럴까?
법을 둘러싼, 아니 법에 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본원적인 물음이 ‘합법성과 정당성’의 딜레마가 아닐까 싶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毒杯)를 받아들인 것이 합법성을 대변하는 반면에, 피델 카스트로 등 여러 혁명가들이 법정에서 남긴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최후진술은 정당성을 상징한다.
법이라면 모름지기 합법성과 정당성의 두 측면을 모두 갖추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서 합법성은 법의 외연(外延)이고, 정당성은 법의 내용이라고들 말한다. 각자가 주관적으로 “이건 법이 아니다”고 판단하면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법적 안정성이 흔들리고, 이로써 사회는 아노미 내지는 무질서의 상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절차에 합당하게 제정된 법률과 집행된 행정 및 재판에 대해 그 합법성을 일응 인정해오고 있다.
물론 희생을 무릅쓰고서 ‘정의롭지 못한 법’에 맞서온 숱한 용기 있는 행위들이 인류 역사를 견인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각종의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온 인권 및 민권 투쟁, 시민불복종운동 등이 그러하다. 이런 가운데 나치의 불법국가를 몸소 경험한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전후에 ‘법률적 불법’과 관련하여 유명한 ‘라드브루흐 공식’을 내놓았다. 즉 “극도로 부정의(不正義)한 실정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경험칙상으로도 합법성은 보수의 언어이고, 정당성은 진보의 언어였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특검법안 등의 법률안에 대한 무려 42차례의 거부권 행사 또한 어쨌든 합법성의 테두리 내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권력을 손에 쥐고 있을 적에는 티끌 하나의 흠이라도 애써 찾아내서는 반대세력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위헌적인 비상계엄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니, 지난 1년 사이에 처지가 뒤바뀐 셈이다. 이들에게는 합법성과 정당성의 딜레마가 그저 꽃놀이패 같은 법기술일 뿐이다.
헌법이 정하는 요건과 절차를 갖추지 못한 지난 12·3 비상계엄은 헌법재판소가 거듭해서 확인하듯이 합법성의 테두리를 한참이나 벗어난 위헌·위법한 행위였다. 그런데도 터무니없는 비상대권을 내세워서 구국(救國)의 결단이라며 정당화한다. 과거에 무소불위의 절대군주에게 대권(大權)이라는 게 주어졌었고, 또한 “왕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다.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인데, 윤석열 자신이 또한 법률가이기에 형법상의 금지착오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왜 이럴까하는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멀리는 일제강점 하의 친일문제부터 시작해서 제주 4·3사건 등 여러 양민학살사건과 군사쿠데타로 집권했던 지난 일들에 대한 법적 그리고 역사적 단죄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동안 이를 내심으로 용인해온 이들에게는 지난 12·3 비상계엄과 친위쿠데타가 그다지 별스런 일이 아닐 거라고도 넉넉히 짐작된다.
“자유롭고 세속화된 국가는 그 스스로가 보장할 수 없는 여러 전제조건과 함께 살아간다.” 독일 헌법학에서 회자되는 ‘뵈켄회르데의 명제’가 이와 같다. 즉 헌법이 보장하고 마련해둔 자유와 국가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일단은 감수해야만 하는 민주헌법국가가 지닌 숙명을 일컫는다. 이는 정치학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의 역설’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최일남 작가가 오래전의 소설에서 가족을 두고서 때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로 비유했듯이, 국가라는 배는 오죽이나 크게 흔들릴까 싶다. 이렇듯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니, 이것으로나마 위안 삼으며 녹록지가 않았던 한 해를 갈무리한다.
물론 희생을 무릅쓰고서 ‘정의롭지 못한 법’에 맞서온 숱한 용기 있는 행위들이 인류 역사를 견인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각종의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온 인권 및 민권 투쟁, 시민불복종운동 등이 그러하다. 이런 가운데 나치의 불법국가를 몸소 경험한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전후에 ‘법률적 불법’과 관련하여 유명한 ‘라드브루흐 공식’을 내놓았다. 즉 “극도로 부정의(不正義)한 실정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경험칙상으로도 합법성은 보수의 언어이고, 정당성은 진보의 언어였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특검법안 등의 법률안에 대한 무려 42차례의 거부권 행사 또한 어쨌든 합법성의 테두리 내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권력을 손에 쥐고 있을 적에는 티끌 하나의 흠이라도 애써 찾아내서는 반대세력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위헌적인 비상계엄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니, 지난 1년 사이에 처지가 뒤바뀐 셈이다. 이들에게는 합법성과 정당성의 딜레마가 그저 꽃놀이패 같은 법기술일 뿐이다.
헌법이 정하는 요건과 절차를 갖추지 못한 지난 12·3 비상계엄은 헌법재판소가 거듭해서 확인하듯이 합법성의 테두리를 한참이나 벗어난 위헌·위법한 행위였다. 그런데도 터무니없는 비상대권을 내세워서 구국(救國)의 결단이라며 정당화한다. 과거에 무소불위의 절대군주에게 대권(大權)이라는 게 주어졌었고, 또한 “왕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다.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인데, 윤석열 자신이 또한 법률가이기에 형법상의 금지착오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왜 이럴까하는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멀리는 일제강점 하의 친일문제부터 시작해서 제주 4·3사건 등 여러 양민학살사건과 군사쿠데타로 집권했던 지난 일들에 대한 법적 그리고 역사적 단죄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동안 이를 내심으로 용인해온 이들에게는 지난 12·3 비상계엄과 친위쿠데타가 그다지 별스런 일이 아닐 거라고도 넉넉히 짐작된다.
“자유롭고 세속화된 국가는 그 스스로가 보장할 수 없는 여러 전제조건과 함께 살아간다.” 독일 헌법학에서 회자되는 ‘뵈켄회르데의 명제’가 이와 같다. 즉 헌법이 보장하고 마련해둔 자유와 국가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일단은 감수해야만 하는 민주헌법국가가 지닌 숙명을 일컫는다. 이는 정치학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의 역설’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최일남 작가가 오래전의 소설에서 가족을 두고서 때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로 비유했듯이, 국가라는 배는 오죽이나 크게 흔들릴까 싶다. 이렇듯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니, 이것으로나마 위안 삼으며 녹록지가 않았던 한 해를 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