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자연이 건네는 말’] 무너지는 남극
  전체메뉴
[이정모의 ‘자연이 건네는 말’] 무너지는 남극
2025년 11월 13일(목) 00:20
나는 남극입니다. 지구의 끝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수백만 년 동안 얼음 속에 잠들어 있던 나는 이제 깨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무너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내 숨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지만 여러분의 인공위성은 그 미세한 떨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위를 덮고 있는 얼음은 단순한 눈덩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500만km³가 넘는 담수를 품은 거대한 저장고이며 그 무게는 지구의 기울기조차 조금씩 바꿀 정도입니다. 그런데 위성관측이 시작된 1979년 이후 내 바다얼음(해빙)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미국 국립빙설자료센터에 따르면 2025년 남극 해빙의 여름 최소 면적은 198만km²로 위성 기록상 두 번째로 작은 수치였습니다. 겨울 최대 면적 역시 1781만km²로 관측되어 지난 47년 중 세 번째로 작았습니다.계절에 따라 약 9배나 차이가 나는 이 극단적 변동을 보면 남극의 계절 리듬이 얼마나 거칠게 요동치는지를 아실 겁니다. 문제는 그 리듬이 최근 들어 급격히 불안정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변화는 단지 수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의 숨결이 바뀌고 있습니다.

NASA의 위성 ICESat-2는 2002년 이후 내가 매년 1350억 t의 얼음을 잃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손실이 누적되면 서남극빙상이 ‘되돌릴 수 없는 붕괴’, 즉 티핑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이 변화는 남극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일상에도 스며들고 있습니다. 남극의 얼음은 여러분의 산책길을 바꿀 겁니다. 내가 녹는다는 것은 단지 남극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내가 녹는다는 것은 곧 지구의 해안선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내가 품은 얼음의 부피는 2650만㎦입니다. 이 가운데 1%만 녹아도 전 세계 평균 해수면은 약 60cm가 오르거든요. 세계인의 40%가 해안선에서 100km 이내에 살고 있습니다. 내 얼음이 무너진다는 것은 여러분의 도시가 물속으로 잠긴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해류 변화입니다. 해빙은 바닷물이 얼은 것이지만 녹을 때 담수 성분이 상대적으로 높아집니다. 해빙이 녹아 생긴 담수는 남극 주변 해류를 희석시키고, 전지구 해양순환의 엔진인 남극심층수 형성을 약화시킵니다. 2025년 3월에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현재 추세가 계속된다면 2050년까지 남극심층수의 흐름이 20% 감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변화는 단지 바다의 일이 아니라 기후·폭우·식량 체계까지 흔드는 전지구적 파급을 낳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는 데는 여러분의 나라, 대한민국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988년 남위 62도 지역에 세종기지를 세우며 남극에 첫발을 내디딘 대한민국은 2014년 남위 74도 지역에 장보고기지를 완공해 두 개의 상설 연구기지를 운영하는 세계 열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현재 극지연구소는 남극 빙하 시추, 해빙 관측, 대기화학 분석, 그리고 남극 근해 해양생태계 조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한국 과학자들이 측정하는 데이터는 곧바로 세계 기후모델에 반영되어 기상청의 장기예보와 해수면 상승 예측에도 활용됩니다. 즉 남극은 더 이상 머나먼 대륙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 기후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최근 “남극의 눈이 늘었다”는 뉴스를 들으셨을 겁니다. 실제로 2024~2025년에는 강설량이 늘면서 남극의 표면질량균형이 평균보다 약 2000억 t 높았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과학자들은 “이 일시적 눈폭풍은 장기 손실을 보완하지 못한다”고 단언하고 있거든요. 잠시 쌓인 눈은 곧 녹아내리고 얼음의 하층부에서는 여전히 열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죠. 내가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 싸움을 멈춘 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남극의 붕괴는 갑자기 일어나는 재난이 아닙니다. 서서히 그러나 되돌릴 수 없게 진행되는 침묵의 사건이지요. 한국의 남해안에서도 평균 해수면은 지난 30년간 약 10cm 올랐고 인천항 조위관측소 자료에 따르면 매년 3.2mm씩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일부가 바로 나, 남극의 얼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는 이 모든 변화를 기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이 기록을 읽을 때, 아직 선택할 시간이 남아있기 바랍니다. 나는 그 희망을 얼음 속에 묻은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