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생을 여유롭게 여미기 - 박행순 전남대 명예교수, 전 네팔 파탄의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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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을 여유롭게 여미기 - 박행순 전남대 명예교수, 전 네팔 파탄의대 객원교수
2025년 08월 20일(수) 00:00
우리는 삶의 각 단계마다 참으로 많은 준비를 한다. 진학 준비, 졸업 준비,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출산 준비, 이사 준비, 은퇴 준비…. 그러나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그 마지막, 너무도 공평하고 확실한 죽음 준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도 부실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라고 회자되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죽음을 맞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꼬는 뼈아픈 일침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편하게 생각하는 우리 문화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죽음에 대한 준비를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역 노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10주 과정의 ‘노년세대 웰다잉 교육’이 며칠 전에 끝났다. ‘웰다잉(well-dying)’을 사전에서는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설명하니 꼭 시한부 말기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처럼 들리지만 복지관 회원 자격이 주어지는 60세 이상이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교육을 맡은 강사들은 자신들을 ‘웰라이프(well-life) 지도사’ 자격증 소지자라고 소개한다. 즉 웰다잉은 웰라이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교육 과정은 유언장 작성, 연명의료결정제도와 다양한 장례문화, 특히 수목장림으로 ‘국립 기억의 숲’ 소개, 유골함을 안치한 추모공원 견학,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 등으로 이루어졌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로 잭 니콜슨(카터 역)과 모건 프리먼(에드워드 역)이 주연하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처럼 해보고 싶은 일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버킷 리스트’란 ‘양동이를 걷어차다’라는 어원에 연유한다. 사연인즉,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고 엎어놓은 양동이에 올라서서 목에 밧줄을 걸었는데 한 번뿐인 삶을 이렇게 끝내기가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발밑의 양동이를 걷어차는 대신, 생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의 목록을 쭈욱 적어서 하나씩 해 보면서 지워나가는 것이다.

억만장자 에드워드와 자동차 정비사인 카터는 말기암을 앓는 환우로 만나서 의기투합하여 병원을 탈출한다. 스카이다이빙, 이집트 피라미드 관광, 자동차 경주에도 도전 하는 등 스릴을 만끽하며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즐겁게 경험하면서 나름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노인복지관 수강생들 다수가 원하는 것은 여행, 특히 세계여행을 버킷 리스트에 올린 것은 우리 세대의 빈곤했던 삶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한참 전부터 젊은이들은 부모 덕에, 또는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여 자유롭게 배낭을 메고 세계여행을 하지만 우리 세대의 절대 다수는 그런 넓은 세상을, 그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처음에는 딱히 해보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나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다보니 밤하늘에 별이 보이듯 하나, 둘,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겨났다. 이십여 년 전, 오십 중반에 하와이 열방대학의 5개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큰 도전을 받고 인생 이모작을 계획했었는데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어릴 때 꿈이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 봉사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물질로서 도우면 되겠다. 세계 여행 대신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보고 얼마 되지 않지만 재산도 정리하고 싶다. 카터와 에드워드처럼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담대함 대신 모험을 줄이고 안전을 택하는 속셈은 아직 진짜 버킷 리스트는 아닌 것도 같다.

외래어 ‘웰다잉’의 우리말 대체어로 ‘여생을 여유롭게 여미기’를 제안한다. ‘여미기’는 ‘바로잡아 단정하게 합치다, 차분히 가다듬어 다잡다, 마무리를 짓다‘라는 우리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가장 확실한 죽음을 준비하여 당황하지 않도록, 너무 많은 후회가 남지 않도록, 여생의 내면과 주변을 여유롭게 여미고 싶다.

마지막 시간에 수료증을 받고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리며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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