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옛 전남도청’ 명칭을 바꾸나- 박성천 편집국 부국장·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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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옛 전남도청’ 명칭을 바꾸나- 박성천 편집국 부국장·문화부장
2025년 08월 06일(수) 00:20
이제는 고전적인 명제가 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존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상정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언어는 존재를 드러내는 공간’이라는 의미일 수 있겠다.

얼마 전 ‘광주 정신’의 근거인 ‘5월 정신’을 흔드는, 존재의 근거를 의심케 하는 일이 있었다. 옛 전남도청 본관 등 5·18 관련 민주평화교류원(민평)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분리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분리 외에도 ‘옛 전남도청’의 명칭도 새롭게 바꾸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문화계 인사들이나 5·18을 겪은 시민들은 대체로 “뜬금없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라는 냉소와 분노의 반응을 보였다.



ACC서 옛 도청 분리, 있어선 안돼

ACC에서 민평의 분리 및 명칭 변경 시도가 추진된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전일빌딩245에서 옛전남도청복원협의회(협의회) 주최로 ‘옛 전남도청 명칭 및 운영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협의회는 문체부 산하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추진단), 광주시, 옛 전남도청복원범시도민대책위원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협의체는 정부와 광주시, 민간이 참여하는 터라 형식상 구색은 갖춘 것으로 비쳐진다.

문제는 지난해 문체부가 발주한 ‘옛 전남도청 복원건물(전시관 등) 조직 구성·운영 방안 기본 연구(용역)’가 공개되면서 드러났다. 주 내용은 사실상 민평의 분리에 방점이 놓여 있다. 용역안에는 국가보훈부, 행정안전부, 문체부가 담당할 시 장·단점과 정부부서 보조기관, 정부부서 소속기관, 특수법인 등의 운영방식에 대한 비교 내용을 담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운영방식과 주체를 문체부 소관 1차 소속 기관처럼 운영하는 방안이 최적안으로 제시됐다는 점이다.

뜻밖에도 오월단체는 민평을 ACC에서 분리, 행안부로 이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오월단체 대표로 참석한 김공휴 5·18부상자회 총무국장은 “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 일환에서 옛 전남도청이 문체부 소속이 됐으나 옛 전남도청은 5·18최후 항쟁지로서 중요하고 종합적인 공간이므로 5·18 민중항쟁과 국가폭력 관련 업무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 소관이 적절하다”고 언급했다. <광주일보 6월 12일자 3면>

옛 전남도청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오월단체가 그 같은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의 최후 항쟁지이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의 핵심 공간인 옛 전남도청을 ACC에서 떼 내자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지역 정서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 광주정신을 문화예술로 승화해 세계에 발신한다는 ACC의 설립 취지를 부정할 뿐 아니라 ACC 5개원(민평, 창조원, 정보원, 예술극장, 어린이문화원) 가운데 핵심 근거인 민평을 분리한다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법체계를 흔드는 발상이다.

더욱이 이재명 정부가 지역 공약으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3.0을 내세우는 마당에 ‘분리’ 운운은 문체부의 민평 운영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5월 단체 중심으로 설립한 법인’을 옛 전남도청 복원 건물 운영 특수법인으로 해야 한다는 5월단체들의 주장 또한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더더욱 황당한 것은 옛 전남도청 명칭 변경에 관한 문제로, 문체부는 9가지 명칭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옛 전남도청 등을 배경으로 쓰여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한강은 수상자 강연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는’ 그 공간이 옛 전남도청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민주평화원’ 의미 되살려야

토론회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은 문체부가 민주평화교류원 운영주체 용역을 수행한 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김희송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문체부가 이번 용역을 진행하는 것은 뒤로 빠지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지역의 의견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해 다시 막대한 예산을 들여 복원사업을 진행하는 잘못을 했음에도 반성없이 과거로 회귀하는 태도”라고 지적했다. 오월어머니집과 5·18서울기념사업회도 성명서를 내고 “5·18 상징 옛 전남도청에 다른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주장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하이데거는 본질을 도외시 한 채 도구적인 방식으로 언어가 차용되면 존재의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지적했다. 게오르규의 시 ‘말’이라는 작품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언어는 사물(공간)에 고유성, 본질을 부여하는 최적의 도구다. 달리 말하면 고유성과 본질을 잃으면 공간은 의미를 잃고 만다. 도대체, 누가, 왜, 민평을 분리하고 ‘옛 전남도청’ 명칭을 바꾸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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