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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명 가수가 아니다
2020년 12월 28일(월) 08:00
최유준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
정확히 10년 전에 그는 첫 번째 EP 음반(싱글 음반과는 달리 여러 곡이 담기지만 정식 ‘앨범’보다는 수록곡 수가 적은 ‘미니 앨범’)을 발매했다. 이 음반에 담긴 ‘에릭스 송’(Eric’s Song)이라는 영어로 쓰인 노래의 맨 마지막 가사에 ‘광주’(Gwangju)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부분 가사를 간단히 번역하자면 이렇다. “당신의 세계에 컬러를 넣으세요. 친구들을 넣으세요. 그리고 광주를 넣으세요.” ‘당신의 세계’는 다채로운 감성(‘컬러’)과 교감(‘친구들’) 그리고 공감이 이루어지는 장소(‘광주’)에 의해 완성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왜 ‘광주’일까? 노래를 만들고 부른 그가 광주 출신이기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부터 광주에서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을 공부한 그는, 판소리 전공을 포기하고 재수 끝에 불문학 전공으로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학내 록그룹의 보컬로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어쿠스틱 기타를 든 싱어송라이터가 되었다. 한국 민요(판소리) 전공을 꿈꾸었다가 서양 민요 혹은 초국적 민요(포크 음악)를 전공하게 된 셈이다.

다소 촌스럽게 표현하자면, 그는 ‘광주가 배출한’ 한국 대중음악계의 보기 드문 아티스트다. ‘광주가 배출한’이란 표현은 물론 세련되지 못했지만,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수도권 중심주의적 풍토에서 자신의 데뷔 음반 노래 가사 속에 ‘광주’라는 단어를 새겨 놓을 정도로 ‘자기 서사’에 정직한 음악가에게 붙일 수 있는 정당한 수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첫 EP 음반 발매 직후 2011년에 ‘EBS 스페이스 공감’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인 ‘헬로 루키’에 선정되었다. 2012년에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음악 기획사에서 초청을 받아 유럽에서 라이브 공연을 이어 가기도 했다. 2014년과 2015년 그리고 2019년에는 영국의 유명 포크 음악 페스티벌의 초청 뮤지션이 되었고, 2015년과 2018년에는 한국대중음악상 중 ‘올해의 음악인’ ‘올해의 포크앨범’ 등 각종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 정도면 오래전부터 국내외에서 이름을 알린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임을 인정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직접 기타 반주를 하며 주로 영어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고음에서 가성으로 미세하게 꺾는 시김새가 아이리시 포크송의 향취를 풍기지만 판소리의 흔적도 지울 수는 없다. 듣기에 따라서는 서양 클래식의 벨칸토 창법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모든 창법의 결합이 그의 음악이 갖는 독특한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규정해 준다. 자신의 유니크한 스타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이후라서인지, 2017년에 발표한 ‘하이랜더’나 ‘가야’와 같은 노래에는 사실상 노골적인 남도민요 창법이 담겨 있다.

방송이나 음악회 진행에도 능한 그는 개관 초기의 ACC 프로그램을 소개하기 위해 ‘광주 MBC’에서 기획한 ‘아트 아시아’ 프로그램의 MC를 맡기도 했다. 올해에도 그는 8월부터 11월까지 광주 양림동에서 ‘커밍홈’ 프로젝트 라이브 공연을 아홉 차례 진행했다. 김사월, 선우정아, 요조, 장필순 등의 가수들이 그의 고향인 광주에 초대되어 그와 함께 대화하고 노래했다. 이 라이브 시리즈는 코로나 여파에도 실제 청중들이 동참한 가운데 유튜브로 라이브 생중계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과 함께 그는 ‘우정의 정원으로’라는 공동 작사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동명의 음반이 발매되었다.

그를 ‘무명 가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까지 얘기해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독자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외화내빈의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길이란 현재 아이돌 팝이나 트로트 아니면 오디션밖에 없다. 꽉 채운 10년 동안의 음악 활동에서 총 여덟 장의 정규·비정규 음반을 발매한 그가, 현재 방영중인 JTBC의 ‘무명 가수’를 위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싱 어게인’에 참가자로 출연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이름 대신 ‘64호 가수’로 불리며 1라운드를 통과했지만, 팀 경연이었던 2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은 이름 없이 참가번호로만 불리다가 탈락하는 순간에만 자신의 이름을 밝히게 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최고은’이다. ‘유명’이냐 ‘무명’이냐의 판단을 오직 중앙 미디어의 권력에 내맡기는 게 앙상한 한국 음악 생태계의 현실이지만, 그의 고향 광주에서만큼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최고은은 무명 가수가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