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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사천택, 몽고군에 투항, 대원제국 수립 큰 공
2020년 12월 08일(화) 09:00
<초당대총장>
사천택(史天澤, 1202~1275)의 자는 윤보(潤甫)로 하북성 영청 출신이다. 몽고 제국에 투항한 한족으로 쿠빌라이 칸을 도와 대원 제국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

금나라 호족 사병직(史秉直)의 셋째 아들이다. 1213년 금나라를 침공한 몽고군 사령관 무하리에게 집안이 투항했다. 하북성 진정(眞定)에 근거하며 유력 한인세후가 되었다. 징기스칸부터 헌종 몽케 칸까지 대대로 섬겼다. 사천택 영지가 징기스칸의 막내 아들 톨루이 가문의 관할에 들어가면서 톨루이 일족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몽케가 동생인 쿠빌라이를 막남한지(莫南漢地) 대총독으로 임명했다. 대중국 정벌의 총책임자로 기용한 것이다. 몽케는 몽고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몽고 지상주의자였다. 쿠빌라이는 보다 유연한 세계관을 가지고 농경 중심의 중국사회를 수용했다. 쿠빌라이를 견제하기 위해 몽케는 감사단을 보내 규칙위반, 탈세, 범법 행위 등을 적발했다. 다수의 관료를 처형했다. 사천택은 톨루이 가문과의 인연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1259년 몽케가 대송 정벌전을 지휘하던 중 사천성 조어산에서 병사했다. 쿠빌라이와 몽고에 남아있던 동생 아리크부케간 후계 경쟁이 불가피했다. 쿠빌라이는 1260년 쿠릴타이를 열어 칸이 되었지만 앞길은 험난했다. 산동지방을 다스리던 이단(李端)이 반란을 일으켰다. 산동의 소금과 구리가 전쟁 재원이 되었다. 몽고에 인질로 가있던 아들 이언간이 탈출하자 쿠빌라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몽고군을 살육하고 연주와 행주를 남송에게 넘겼다. 사천택은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1262년 봄 제남 주변에서 이단의 군대를 공격해 사천명 이상을 죽였다. 제남에 있던 이단의 근거지를 포위하고 무기와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8월에 이단은 물에 빠져 죽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몽고군에 잡혀 처형되었다.

남송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요 공격 대상은 군사요충지 양양이었다. 사천택은 한인 유정, 위구르인 아릭 카야, 몽고 장군 아주 등을 거느리고 포위전에 나섰다. 남송은 명장 여문환을 수비사령관으로 투입했다. 양양 정벌에 거의 5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양양 주변의 번성을 정복해서 승리할 수 있었다. 여문환은 임안의 남송 조정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재상 가사도는 이를 묵살했다. 양양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남송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양양 패배 후 가사도가 직접 군대를 지휘했는데 사천택은 쿠빌라이에게 바얀을 총사령관으로 기용토록 건의했다. 바얀과 같은 지휘관이 없으면 남송과의 싸움이 혼란과 분쟁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273년 여름 바얀에게 군 통수권이 주어졌다. 투르크인으로 일찍이 쿠빌라이의 동생 훌레구를 수행해 페르시아와 중동 원정에 참여해 군사 전략에 뛰어났다. 사천택은 남송 정벌중인 1275년 사망했다.

사천택 가문은 한인세후의 일원으로 몽고의 북중국 경영에 공헌했다. 쿠빌라이는 신임하는 사천택과 요추에게 몽고의 사법체계를 정비토록 명했다. 금나라의 제도를 사용했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이 속출하였다. 중국 백성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법령을 만들게 하였다. 1264년 법령이 마련되었지만 1271년 대원 제국 성립때까지 금나라 법규가 우선 적용되었다. 쿠빌라이에게 효율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한인 유학자를 포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를 위해서는 수도를 몽고의 상도에서 현 베이징인 대도(大都)로 천도하는 것이 선행 조건이었다. 유병충이 새 수도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늘어나는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쿠빌라이는 생목인인 아후마드를 기용했다. 아후마드는 무리한 증세 정책을 밀어부쳤다. 아들 마수드를 상업의 중심지인 항주의 다루가치로 임명했다. 사천택과 염희건 등 한인 관료들은 추가 증세가 중국 신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줄 것이라며 반대했다. 아후마드가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반역의 징후까지 보인다고 공격했다. 아후마드는 유병충이 1274년 사천택이 1275년 요추가 1279년 병사하면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사천택은 원나라의 훈신(勳臣)으로서 재상에 올라 대원 제국 착근에 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