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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요추, 쿠빌라이 도와 대원제국 건국에 공헌
2020년 12월 14일(월) 22:00
<초당대총장>
요추(姚樞, 1202~1279)는 하남성 낙양 사람으로 자는 공무고 호는 설제다. 몽고의 쿠빌라이를 도와 대원 제국 건국에 크게 공헌했다.

쿠빌라이의 초청으로 본격적으로 몽고 제국을 위해 일했다. 1256년 즉위한 헌종 몽케는 동생 쿠빌라이를 막남한지(莫南漢地) 대총독으로 임명해 북중국 관리를 위임했다. 북중국 정복에는 성공했지만 식량과 물자 공급에 애를 먹었다. 참모 요추의 건의에 따라 하남과 섬서 지역에 둔전(屯田) 설치를 몽케에게 건의했다. 이를 통해 중국내 강력한 지배 기반을 만들려는 계획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몽케는 동생에게 개봉 주변과 서안 중 하나를 새 영지로 제안했다. 요추는 서안이 관중 평야에 가깝고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다며 서안을 영지로 받도록 건의했다.

쿠빌라이가 남송 정벌에 앞서 대리 원정에 나서자 이를 수행했다. 징기스칸의 장수인 수베테이의 아들 우랑카타이가 군략 면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큰 살상 없이 대리국을 정복하는데 요추의 역할이 컸다. 점령지의 인명과 재물을 박멸하는 도성(屠城)을 억제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진 것은 요추의 간언 덕으로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는 쿠빌라이에게 조빈(趙彬)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975년 송태조 조광윤은 장군 조빈에게 남경 정복의 명을 내렸다. 조빈은 도중에 꾀병을 부려 부하들이 약탈하지 않고 주민을 죽이지 않는다고 맹세하면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고 말해 큰 살생 없이 정벌을 마무리 지었다. 쿠빌라이가 이를 수용해 종전의 중앙아시아 원정과는 달리 큰 살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리국의 재상 고태상을 죽였지만 그의 가족들은 사면되었고 이후 중국식 교육을 받으며 차별받지 않았다.

중국 정벌을 둘러싸고 몽케와 쿠빌라이 사이에 갈등이 커졌다. 몽케는 감사단을 보내 범법 행위, 규칙 위반 등을 이유로 쿠빌라이의 참모들을 처형했다. 쿠빌라이가 형에게 반기를 들면 골육상쟁으로 이어져 결국 쿠빌라이의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요추는 경솔하게 대응하지 말고 몽고 조정의 중신들과 왕족을 잘 설득하도록 건의했다. 쿠빌라이는 직접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상경해 형에게 신종을 굳게 맹세했고 이로써 형제간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1260년 대칸이 된 쿠빌라이에게 산동 지방의 이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소금과 구리 등으로 재력이 풍부한 이단의 반역을 사천택 등의 분전으로 진압했다. 부재상인 왕문통의 딸이 이간의 부인으로 사위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연루되었다. 요추와 두묵 등 한인 관료들은 왕문통과 그의 아들을 처형토록 요구했다. 쿠빌라이는 그들을 처형했고 위법 행위는 낱낱이 신민들에게 공개되었다.

농업 장려를 위해 권농사(勸農司)가 설치되었고 요추는 대사농(大司農)으로 취임했다. 반세기에 걸친 전란으로 북중국의 토지가 크게 훼손되었고 생산량도 격감했다. 사천택과 함께 몽고의 사법 체계를 정비했다. 몽고는 북중국을 점령하자 여진족의 금 왕조 법령을 계승하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정되었다. 중국 신민들에게 보다 편리한 법령을 제정하게 되었다. 특히 사형집행 등 가혹하고 보복적 성격의 처형 방식을 최대한 지양했다. 송나라 때의 혹형 등을 폐지할 것을 건의했다. 1262년에는 궁정의 음악과 춤의 부활을 제안했다. 유병충이 구체적인 실무 작업을 담당해 1271년까지 유교식 궁정 음악과 춤이 정착되었다. 담당 기구인 태상예의원(太常禮儀院)도 설치했다.

쿠빌라이의 차남인 진금(眞金)의 중국식 교육을 두목과 함께 담당하기도 했다. 쿠빌라이에게 북송 이후 발전해 온 신유학(新儒學)을 소개했다. 중국 통치를 위해 필요성을 느낀 쿠빌라이도 적극적으로 신 유학자 집단을 포용했다. 허형(許衡)은 대표적인 학자로 1267년 국자제주(國子祭酒)에 임명되었다.

요추는 유학자로서 송대의 정주이학(程朱理學)의 계승과 전파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양유중과 함께 태극서원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명유 조복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학의 학풍을 이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279년 사망했는데 사후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