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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은 어떻게 악덕이 되는가?
2020년 09월 28일(월) 00:00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많은 사람들이 지키며 사는 미덕들. 가령 용기 있는 행위, 손익을 따지지 않는 정직,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내미는 마음씨는 애써 ‘미덕’이라고 할것도 없는 미덕이다. 그런데도 ‘미덕’이라 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 미덕의 가치들이 너무나 쉽게 전복되거나 파괴되기 때문이다.

미덕은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를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익숙한 방법이며 삶 자체이기에 미덕의 의미 상실은 더 치명적이다. 미덕은 왜 자체로서 힘을 갖지 못하는가? 좋은 학교에 다니고, 경쟁률 높은 시험을 통과해서 얻는 것이 아닌 탓인가? 브레히트는 이 문제의 본질을 작품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속에서 다룬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의학을 전공하고, 독일 통일 전 동베를린에서 주로 활동한 극작가 겸 연출가이며 시인이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브레히트는 의사보다는 연극 일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세계 연극계를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작품을 썼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다. 그는 나치를 피해서 여러 곳을 전전하며 망명 생활을 했는데, 당시 망명했던 스웨덴에서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을 배경으로 이 작품을 썼다.

작품의 계기는 나치 전쟁에 대한 독일 주변국의 이중적인 태도였다. 표면적 입장은 전쟁을 반대하면서 속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계산하는 데에 바쁘고, 적당히 공조해서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행위들. 이 이중적인 태도를 억척어멈, 안나 피얼링을 통해서 비판한 것이다. 억척어멈은 세 남매와 함께 목숨 줄인 행상 마차를 끌고 ‘빵이 부패하기 전에 팔 생각으로 포화를 뚫고’ 군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종군 행상인이다.

물론 돈만 벌 수 있다면 총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거래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억척어멈의 목표 역시 여느 부모들처럼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이다. 세 명의 자식들이 각자 성이 다른들 무슨 대수인가! 30년이라는 긴 전쟁을 겪다 보면 더한 일도 자연스럽다는 태도다.

낡은 행상 마차와 성이 다른 세 자식이 전부인 억척어멈에게는 유럽의 30년 종교전쟁은 고맙기만 한 돈벌이 기회이자 축복이다. 이런 억척어멈에게 가장 큰 불행은 평화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쟁이 끝났을 때, 억척어멈은 실망과 분노의 심정을 표현하며 이렇게 외친다. “전쟁은 장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전쟁이란 종사자들을 잘 먹여 살린다는 것이야. 평화가 나를 파멸시켜요.”

그 사이 용감하게 군대에 간 큰아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정직함으로 늘 칭찬받던 작은 아들도 군대의 회계 금고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는다. 마지막으로 남은 딸은 전쟁의 상흔으로 이미 청각과 언어 장애를 겪는 처지에도 북을 쳐서 적의 공격을 알리다가 총에 맞아 숨진다.

전쟁은 누군가에게는 돈벌이 기회, 영웅의 훈장을 달 기회, 또는 현재의 권력과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좋은 수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에게는 억척어멈네처럼 모든 것을, 자식들마저 내줘야 하는 비극이다. 억척어멈이 억척스럽게 돈을 버는 동안 자식들은 자연스럽게 용기·정직·연민의 미덕을 행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독하게 버는 돈이 곧 자식들의 목숨 값인 셈이다. 이보다 더한 상실의 삶, 소외되고 모순된 삶이 또 있겠는가.

브레히트는 30년 전쟁을 통해서 전쟁의 직접적인 문제만을 말하지 않는다. 전쟁은 은밀하게 고착되는 현실의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와 이에 대한 인식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은유다. 그래서 전쟁은 ‘미덕’이 끝까지 미덕으로 지켜질 수 없게 하는 구조적 모순과 이익의 덫에 걸려서, 치러야 할 대가를 외면하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상징이다.

억척어멈만 해도 그렇다.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한 억척스러움이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다만 그 대가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 맹목적인 현실 순응이 미덕의 가치 전복을 가져온다. 브레히트가 “그렇게 낭만주의적인,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오!”라고 일갈하는 이유다. 한 군인이 억척어멈에게 “전쟁에 붙어서 먹고살려면 무엇이든 대가를 치러야 되는 법이지”라고 하는 말이 뼈아픈 물음으로 읽힌다. 오늘날 우리 또한 또 다른 억척어멈이거나 혹은 억척아범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