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노래, 기억과 해석 사이
![]() 최 유 준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 |
“해나와 나의 목적은 도청 앞에서 열리기로 한 광주시향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의 연주를 듣는 것이었다. 그해는 80년 5월 광주에서 30년이 지난 해였다. 기념할 만한 해였기 때문에 그런 연주가 야외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 우리가 보기로 한 연주는 비가 와서 취소가 되었대. 해나는 말했고 나는 아쉽기도 했지만 그럼 이제 몇 년 전 한 번 본 게 다인 해나와 무얼 해야 할지 약간 당황스러웠다.”
위의 인용문은 박솔뫼의 단편 소설 ‘그럼 무얼 부르지’ 속에서 ‘나’가 미국에서 알게 된 ‘해나’와 3년 만에 광주에서 다시 만난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인용문 속 에피소드로 쓰인,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의 ‘광주시향 5·18 30주년 기념 음악회’는 소설에서 묘사된 대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야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우천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다음 날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의 실내 연주가 이루어졌지만, 애초 기획의 의도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셈이었다. 그것은 시민합창단을 포함한 518명이라는 상징적 숫자의 시민 연주단이 도청 앞 광장에서 한목소리로 연주하고 노래함으로써 ‘오월 코뮌’을 음악적으로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이 음악회를 기획하고 총연출했던 이는 2010년 당시 광주시향의 음악감독이었던 구자범 지휘자였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이제는 프리랜서 음악가인 그가 5·18 40주년을 맞아 광주시와 서울시가 공동 주관한 ‘오월 평화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서울광장 야외 연주 기획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오월의 서사로 번역된 말러 교향곡 2번 외에도 지휘자 자신의 편곡으로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 합창을 삽입시킨 말러 교향곡 3번 마지막 악장을 서곡처럼 연주함으로써 ‘서울의 봄, 광주의 빛’이라는 페스티벌의 주제를 부각시킬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올 초부터 온라인 동영상 오디션을 통해 전국에서 시민 오케스트라와 시민 합창단을 선발했지만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직전에 공연 취소 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518명이 연주할 계획이었던 이 음악회는 결국 네 명의 성악가와 네 명의 기악 연주자(직접 편곡과 피아노 반주를 맡은 지휘자 포함)만이 참여한 30분가량의 짧은 실내악 공연으로 축약되었고, 지난 5월 16일 밤 ‘오월에 부치는 음악 편지’라는 소박한 제목으로 온라인 생중계되었다. 말러 교향곡 2번은 한국어로 노래하는 실내악 반주의 짧은 독창 연가곡으로 변모했다. 실제로 말러가 교향곡을 쓰는 데 활용했던 가곡들을 되살린 것이다. 이들 가곡은 구 지휘자의 한글 가사 번역과 편곡을 통해 섬세하게 오월의 이야기로 옮겨졌고 무대 위의 성악가들도 오페라적 연기와 함께 오월의 역사를 재현했다. 예컨대 원곡에서 교수대에 올라 무고한 죽음을 맞는 ‘북치는 소년’은 오월 최후의 항전에서 죽음을 맞은 무고한 ‘시민’이 되어 ‘전남도청’과 ‘무등산’에 안녕을 고한다.
죽음과 꿈, 고통과 환멸에서 소망과 부활에 이르는 이 오월의 음악적 이야기에서 음악감독이 합창은 물론 중창까지도 쓰지 않은 것은, 예기치 않게 축약 재구성된 이 공연의 ‘미완’의 성격과 그에 따른 아쉬움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보헤미아의 가난한 유대인으로 태어나 제국주의적 야욕에 물든 세기말의 유럽을 살아간 작곡가 말러가 그려 낸 음악적 서사가 오월의 기억과 연결된다는 것은 사실상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고통과 비극의 음악적 표현은 인류 공통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박솔뫼의 소설에는 ‘그럼 무얼 부르지’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음악적인 질문이 비중 있게 담겨 있다. 그것은 옛 ‘민중가요’를 듣기조차 불편해 하는 이른바 ‘포스트 오월 세대’에게 어떤 음악이 오월에 대한 기억과 공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한 줄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우리의 기억과 공감은 무수한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래서 ‘무얼 부르지?’ 하고 고민하기에는 우리가, 광주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너무도 많은 고통과 희망의 노래와 음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궁색하나마 답으로 남기고 싶다. 또 한 번 미완으로 남은 광장의 합창이 언젠가 다시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518명이 연주할 계획이었던 이 음악회는 결국 네 명의 성악가와 네 명의 기악 연주자(직접 편곡과 피아노 반주를 맡은 지휘자 포함)만이 참여한 30분가량의 짧은 실내악 공연으로 축약되었고, 지난 5월 16일 밤 ‘오월에 부치는 음악 편지’라는 소박한 제목으로 온라인 생중계되었다. 말러 교향곡 2번은 한국어로 노래하는 실내악 반주의 짧은 독창 연가곡으로 변모했다. 실제로 말러가 교향곡을 쓰는 데 활용했던 가곡들을 되살린 것이다. 이들 가곡은 구 지휘자의 한글 가사 번역과 편곡을 통해 섬세하게 오월의 이야기로 옮겨졌고 무대 위의 성악가들도 오페라적 연기와 함께 오월의 역사를 재현했다. 예컨대 원곡에서 교수대에 올라 무고한 죽음을 맞는 ‘북치는 소년’은 오월 최후의 항전에서 죽음을 맞은 무고한 ‘시민’이 되어 ‘전남도청’과 ‘무등산’에 안녕을 고한다.
죽음과 꿈, 고통과 환멸에서 소망과 부활에 이르는 이 오월의 음악적 이야기에서 음악감독이 합창은 물론 중창까지도 쓰지 않은 것은, 예기치 않게 축약 재구성된 이 공연의 ‘미완’의 성격과 그에 따른 아쉬움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보헤미아의 가난한 유대인으로 태어나 제국주의적 야욕에 물든 세기말의 유럽을 살아간 작곡가 말러가 그려 낸 음악적 서사가 오월의 기억과 연결된다는 것은 사실상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고통과 비극의 음악적 표현은 인류 공통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박솔뫼의 소설에는 ‘그럼 무얼 부르지’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음악적인 질문이 비중 있게 담겨 있다. 그것은 옛 ‘민중가요’를 듣기조차 불편해 하는 이른바 ‘포스트 오월 세대’에게 어떤 음악이 오월에 대한 기억과 공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한 줄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우리의 기억과 공감은 무수한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래서 ‘무얼 부르지?’ 하고 고민하기에는 우리가, 광주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너무도 많은 고통과 희망의 노래와 음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궁색하나마 답으로 남기고 싶다. 또 한 번 미완으로 남은 광장의 합창이 언젠가 다시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