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요맘땐 이 맛
2020년 02월 12일(수) 00:00
옥영석 농협 광주공판장장
20여 년 만에 고향에 내려오니 가고 싶은 곳, 먹고 싶던 것들이 노트 한 장에 써도 모자랄 지경이다. 추억도 입맛도 계절을 따라가는지 눈 덮인 서석대에 올라 심호흡을 하고 내리막길에 들르곤 하던 보릿국 집이 며칠 내내 어른거렸다. 마침 아래층 식당에서 홍어애 보릿국을 끊인다는 얘기에, 얼른 일어서서 같이 갈 사람을 찾는데 반응이 영 신통찮다. “그래 점심이라 옷에 냄새가 배면 곤란하겠지. 아니면 선약들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식당으로 나선다.

구수하기도 쾨쾨하기도한 홍어애국은 요맘때가 가장 깊고 그윽한 맛을 내는 음식이다. 밥을 참 많이도 담아 주시는 아주머니, 보릿국은 우동 그릇에 가득 퍼주신다. 갯벌 바닥에 미끄러지듯 한 수저 가득 국물을 떠 넣으니 알싸한 전율이 입안에서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한참을 먹다 둘러보니 한 신규 직원은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만 깨작거린다. 물어보니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이란다. 나 역시 홍어를 먹을 수 있기까지 20여 년 넘게 걸렸다. 관혼상제에 빠지지 않던 게 홍어와 죽상어였지만 주로 어른들 차지였고, 냄새가 거북해 어린 나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홍어에 반색하는 동료들을 보면 못 먹는 사람이 손해라는 말에 한두 점 씹어 보았지만 맛도 물컹한 식감도 별로인데다, 씹다 보면 남는 껍질을 내뱉기도 삼키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상가라도 두어 시간 다녀오는 날이면 사나흘 지나도 빠지지 않는 쿰쿰하고 쾨쾨한 냄새는 가족들이며 주변 동료들이 반겨 줄리 만무다.

어쨌든 어디가나 빠지지 않는 가장 남도스러운 음식을 남처럼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음식 맛을 모른다거나 왠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자격지심을 갖게 했다. 누가 강권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톡 쏘는 맛이 일품이라는 붉은 코를 먹어 보고, 오독오독 씹는 맛이 별미라는 날개를 볼 때마다 먹어 봐도 왜들 그리 홍어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 코, 2 날개, 3 꼬리‘ 순서대로 맛있다거나, 삼합이 나오면 어디가나 비슷한 맛 묵은지에 수육을 싸먹는 것으로 홍어 맛을 아는 체했다. 타향 사람도 잘 먹는데 홍어 정도는 먹을 줄 알아야 할 것 같고, 음식 맛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홍어를 마주할 때마다 먹어 보고 찌푸리고 후회하기를 십 수년. 세월이 지나 주름살과 흰머리가 늘면 입맛도 곰삭아지는지 그 쩌는 냄새 뒤에 눈, 코, 입천장과 귓구멍까지 뿜어져 나오는 알싸하고 얼큰한 맛을 어느 순간부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두툼한 홍어 한 점 골라 씹으면서 입을 살짝 벌리고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다음, 홍어와 탁주를 뒤섞으면서 코로 숨을 내쉬면 그 짜릿한 맛은 다른 무엇과 비할 데 없다.

그러나 홍어 맛은 어느 게 최고랄 게 없다. 묵은지와 홍어살 위에 삶은 돼지고기를 얹은 삼합이 널리 알려진 진미지만, 흑산도와 목포 인근에서는 생물 그대로 썰어 찰진 맛을 즐기고, 영산포와 광주 등지에서는 삭혀서 톡 쏘는 것을 홍어의 참맛으로 친다.

흑산 홍어가 명성이 자자하다 보니 국내에서는 신안 인근에서만 홍어가 잡히는 줄 알지만 대청도에서 잡히는 물량이 더 많다고 한다. 겨울과 봄에 흑산도 인근에서 산란을 위해 서식하다가 수온이 올라가면 북쪽으로 이동해 서해 5도 인근에서 많이 잡히기 때문이다.

맛은 역시 산란 전에 잡힌 흑산 홍어가 으뜸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홍어는 동지가 지나야 잡히고, 입춘 전후에 살찌고 제 맛이 나며, 2~4월이 되면 맛이 떨어진다고 전하고 있다. 냉장 냉동 기술이 발달해 지구 반대편의 칠레와 알래스카산 홍어가 들어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지만 겨울에 잡히는 지금의 홍어가 제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마침 무등산을 같이 오르던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겨울이 가기 전에 서석대에 올랐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어앳국에 막걸리 두어 잔으로 회포나 풀자니 다행히 가는 겨울이 아쉽지만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