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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지워진, 잊혀진 이름들
[송기동 문화2부장·편집국 부국장]
2019년 04월 03일(수) 00:00
송기동 문화2부장 편집국 부국장
광주시 북구 풍향동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을 찾았다. 건물 바로 앞에는 금빛 흉상이 세워져 있다. ‘민족교육의 선각자’ 그리고 ‘학산(學山) 윤윤기(尹允基) 1900~1950년’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측면에는 자필 한시 ‘북경을 넘나들며 시를 읊다’와 함께 연보가 새겨져 있다. 광주교대와 학산 윤윤기 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에서 2013년 10월에 세웠다.

순천시 연향동 블루시안 아파트와 팔마로 사이 근린공원에는 ‘순천가(順天歌)’ 입체 조형물이 서 있다.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호남 순천을 구경 가자…”로 시작하는 ‘순천가’는 장대와 옥천서원, 선암사, 천자암 등 순천의 주요 명소 40여 곳을 소개하는 판소리 단가이다. 노랫말을 지은 이는 순천 출신 벽소(碧笑) 이영민(李榮珉·1882~1964) 선생이다.

두 사람의 이름은 일반인들에게 낯설다. 기자 역시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만큼 이들이 매체에 노출되지 않은 탓이다. 두 사람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일제 강점기 ‘시대의 격랑’ 속에서 교육과 농민·문화 운동을 통해 독립을 꾀한 독립운동가이다. 또 하나는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이력과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해방 후 74년이 지나도록 국가로부터 독립 유공자 예우를 못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 맞서 교육·농민 운동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19년 4월 현재 독립 유공자는 모두 1만5511명이다. 3·1운동 5290명, 의병 2638명, 국내 항일 3324명, 만주 방면 2412명, 임시정부 1215명 등이다.

또 훈격별로 보면 건국훈장 1만965명(대한민국장 30, 대통령장 92, 독립장 821, 애국장 4323, 애족장 5699), 건국포장 1280명, 대통령 표창 3266명 등이다. 하지만 이는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많은 좌익 계열 지사들을 제외시킨 숫자이다.

보성 출신 학산 윤윤기 선생은 전남 공립 사범대학(현 광주교대)을 마치고 교사 생활을 하며 우리말 사용과 우리 역사 교육, 문맹 퇴치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당시는 교직에 15년간 근무하면 은급(연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1939년 창씨개명에 반대하며 학교를 사직했다. 그리고 이듬해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 조선 최초의 무상 교육 기관인 ‘양정원’(養正院)을 설립해 민족 교육을 실천했다. 해방 후에 학산은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인 1950년 7월, 경찰에 끌려가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골짜기에서 원통한 죽음을 맞았다.

순천 태생인 벽소 이영민 선생은 교육 사업과 농민 운동, 청년 운동을 편 지도자였다. 또 기자이면서 시인이자 서예가였다. 40대에 동아일보 순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박병두(조선일보 지국장), 이창수(시대일보 지국장) 등과 함께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횡포에 맞서 소작 쟁의 운동을 주도했다.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순천 조직 책임자라는 것과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한 죄였다.

출소 후에는 조선 문화 말살 정책을 추진하는 일제에 맞서 ‘조선 성악 연구회’ 결성에 도움을 주고 ‘순천가’를 창작하는 등 판소리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벽소는 정작 해방되고 나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치안유지법에 의한 투옥자’로서 사찰 대상이 돼 탄압에 시달린 것이다. 결국 고향을 떠나 광주 등지에서 은둔하다 1960년 병세 악화로 귀향했고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념 굴레 벗고 재평가를

학산과 벽소는 교육과 농민·문화 운동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던 선각자였으며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두 사람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을 ‘좌익’이라는 두 단어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제는 이념의 굴레와 족쇄를 풀어 주어야 한다. 벽소의 경우 국가보훈처는 두 차례 독립 유공자 신청서를 돌려보냈다. 두 번 모두 이유는 간단했으니 ‘활동 이후 행적 불분명’, 아홉 글자뿐이었다. 이는 같이 활동했던 박병두(1883~1936) 선생이 지난 2005년에 독립 유공자(건국포장)로 추서된 것과 비교된다.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역사에서 지워진 또는 잊혀진 좌익 계열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 역시 명예 회복과 함께 이념의 잣대 대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할 때다.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