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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채 희 종
여론매체부장
2018년 05월 02일(수) 00:00
그리스신화에서 최고의 신은 제우스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한 신은 아폴론(Apollon)이었다. 그 이름은 ‘미남 청년’이란 뜻으로, 제우스 다음가는 자리의 태양신이자 음악·학문·예술·궁술·예언의 신이다. 아폴론은 문무를 겸비한 데다 아름다운 용모에 큰 키와 곱슬머리를 가진 그리스인들이 지향하는 ‘완벽한 이상(理想)’ 그 자체였다. 그러나 연애만큼은 낙오자였다.

그리스 신화의 골간은 신들과 인간의 사랑 얘기다. 그 결과물로 다양한 자손은 물론 도시 국가가 잉태되는 그리스의 기원을 상징하는 내용들로 채워진다. 세부적으로는 제우스의 바람피우기가 중심이고, 나머지 신들의 제우스 ‘따라 하기’가 주변 얘기다.

한데 유독 아폴론만은 실패한 연애담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얘기를 그리스신화의 현대판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 국내 신화 서적들은 ‘아폴론의 슬픈 사랑’이나 ‘아폴론의 실연(失戀)’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아폴론이 가장 매력 있는 신인데도 결국 비련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뭘까? 신화의 아이러니는 분명 아폴론이 연애 초짜라는 표면적 이유 외에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신화나 고전의 가치가 끊임없이 후세에 영향을 끼치는 데 있듯이, 신화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야 함이 마땅하다. 신화는 아폴론이 사랑에 실패한 이유를 신이라는 절대적 위치에서 여성을 차지하려 한 삐뚤어진 욕망과 그로 인한 폭력 때문임을 다양한 예를 들어 보여 주고 있다.



성폭력은 권력형 갑질이다



아폴론은 어느 날 강의 요정 ‘다프네’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을 갈구하며 그녀를 쫓아다닌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던 다프네는 잡히기 직전, 아버지인 강의 신에게 빌어 월계수로 변신한다. 아폴론이 아랑곳하지 않고 월계수를 껴안고 입맞춤을 하자 다프네는 나무로 변했음에도 몸을 움츠린다. 아폴론에겐 사랑이었을지 몰라도 다프네에게는 몸서리치는 성추행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폴론이 월계수 잎으로 만들어 ‘승리자에게 씌워 줄 월계관이 영원히 시들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고개를 끄덕이듯이 가지를 앞으로 구부리며 잎을 흔들었다. 아폴론의 후회와 진정 어린 사과가 다프네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목이다.

다프네의 경우를 굳이 성폭력 사례로 분류한다면 스토킹에 해당하지만, ‘카산드라’와 ‘시빌레’의 경우는 선물을 미끼로 끊임없이 추근대는 성추행으로 볼 수 있다. 트로이의 공주인 카산드라에게 반한 아폴론은 예언술을 가르쳐 주는 대신 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한다. 하지만 카산드라가 예언술을 배운 뒤에 사랑을 허락하지 않자, 화가 난 그는 한 번의 입맞춤으로 카산드라의 예언 능력 중 설득력을 없애 버린다. 이로써 트로이 목마로 인해 조국인 트로이가 멸망하리란 것을 예언하는 카산드라의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폭력 이상의 처절한 복수를 한 셈이다.

아폴론은 무녀인 시빌레에게도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접근한다. 시빌레는 모래 한 움큼을 집어 모래알(천 개)만큼 생일을 쇨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녀가 소원을 이룬 뒤, 자신에게 사랑을 허락하지 않자 아폴론은 1000년을 살되, 젊음은 유지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시빌레는 늙고 추해지는 자기 모습에 죽기를 갈망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아폴론은 유부녀인 아테네 공주 크레우사를 동굴로 끌고 가 성폭행한 적도 있었다. 달이 차서 출산이 다가오자 크레우사는 성폭행 현장인 동굴에서 아이를 낳은 뒤 버리고 만다.



미투운동 끝까지 가야 한다



사회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던 미투(#MeToo) 운동이 이제 점차 수그러드는 것 같다. 성폭력은 어떤 유형이든 가장 치졸한 권력 남용이자 악랄한 ‘갑질’의 한 형태이다. 힘의 불균형과 권력(지위)의 상하 관계에서 가진 자가 빚어내는 범죄 행위인 것이다.

문화·예술계를 넘어 검찰과 정치권, 학계, 종교계 등 사회 전반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보면, 이면에는 모두 권력형 갑질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성폭력 가해자 모두 “잘못은 시인하지만 강제성은 없었다”는 입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힘의 우위에 선 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듯, 성폭력을 마치 그래도 되는 양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어떤 종류의 폭력보다도 처절하게 피해자를 괴롭히고, 나아가 파멸로 이끈다. 가정의 달에 수그러지는 ‘미투 운동’을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이다.

/chae@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