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배신의 정치학- 윤 영 기 정치·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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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배신의 정치학- 윤 영 기 정치·경제담당 에디터
2025년 05월 21일(수) 00:00
임동확 시인의 ‘너희들의 조사와 애도를 거부한다’는 시는 답답한 우리 심경을 대변한다.

“나는 객관의 거리를 확보한 자의 기도나/ 너의 교활함과 변신을 변호해 줄 세월과/ 피 묻은 흰 손으로 바치는 꽃 타래를 사절한다/ 능숙하고 매끄러운 문장의 조사를 거부한다…너희들이 써 나가는 모든 현대사 위에/ 너희들의 편견과 간교함을 변호하는 붉은 혓바닥/ 당대를 평화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안일함과 권태와 식곤증에, 그리고 너와 나의 엄연한 패배와 냉소 위에/ 또다시 희생을 강요하며 목울대를 치는/ 너희들의 찬사와 헌화를 거부한다”

시인은 국립5·18민주묘지에 들어서는 정객들의 허위와 배신을 꿰뚫어보고 예견한 듯 까발린다. 그들이 망월묘역에서 향을 사르거나 뒤돌아서 나올 때도 한결같이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앞뒤 다른 공허한 약속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를 ‘12·3계엄’으로 하룻밤에 뭉개버렸다. 대통령 취임 첫 해 5·18 기념식에서 “오월의 정신은 지금도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는 일체의 불법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체의 불법 행위’를 저지르다 오월의 ‘명령’대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 대통령에서 쫓겨났다.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몰고간 그가 반려견과 한강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국민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이 당 사람들은 도대체 반성과 사과를 모른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최근 망월묘역에서 “제게 고함치는 사람들이 5월의 아픔을 알겠나”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내란 공범은 광주를 떠나라”는 시민에 대한 반박이다. 정작 자신의 이름을 건 선대위가 5월 학살자로 지목되는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을 선거대책위원으로 위촉했다가 취소한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 없었다.

정 전 국방부장관은 전두환·노태우 등과 육사 동기로, 1980년 6월 20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2006년에 박탈당한 장본인이다. 정 전 장관 논란을 외면하던 그가 박관현 열사의 묘역에서는 눈물을 보였다. 그 진심과 진정을 우리는 가늠하기 어렵다. 한때 광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안철수 의원은 국민의당 대선 후보 시절

정치인 말보다 실천 지켜봐야

5·18 묘역을 방문해 “앞으로도 계속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 자에 분노만 하며 살 수는 없다”면서 “용서와 화해, 국민 통합과 역사 발전, 그 중심에 광주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전두환 용서를 주장하던 그는 지금 내란세력과 탯줄이 닿아 있는 국민의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다.

돌이켜보면 5·18 정신을 실천했던 정치인들은 화려한 찬사를 늘어놓거나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5년 5·18민주묘지 방명록에 ‘추모 5·18 광주 민주영령’이라고 적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뒤인 2007년 ‘강물처럼’이라고 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6년 방명록에 ‘眞實·自由·正義’(진실·자유·정의)라고 기록했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의 5월 클리셰는 예견됐던 일이다. 5·18이 광주의 아픔에 공감하고 공명하던 국민이 기억하는 ‘위령제’에서 국가기념일로 옮겨갔을 때부터 시작됐다. 항거와 추모가 제도적인 틀에 갇히고 정치가 전면에 나서는 순간부터 5월은 소비되고 오·남용 됐다. 망월묘역에 들러 비석을 쓰다듬고 눈물 흘리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뻔한 드라마보다 더 식상하다. 그들의 참배는 최소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요식행위일 뿐이다.

5월의 성소(聖所)에서 오월영령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유가족의 아픔을 공유하는 질적인 변화는 절대 없다. 단지 광주로 파고들려는 정치적인 서사다. 물론 ‘부미방 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문부식과 같은 연대의식은 없다. “만일 광주가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법정 최후진술도 이젠 아득하다. 5·18로부터 45년이 흘렀다. 살아 남은 자의 부채의식이나 공감의 연대는 젊은 세대에게는 낡은 언어가 됐다. 정치로 밥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 연대의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고 기대하지는 말자.

이진영 전남대 교수는 ‘애도의 정치학’에서 ‘5월의 정치학’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애도의 정치가 항상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위로 한다는 ‘위령’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주체의 의도적 책략에 따라 위령의 성격이 변질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5·18 묘역을 드나드는 정치인의 제스처를 보고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언어와 실천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이 광주가 지켜야 할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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