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의 도시 - 연여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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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의 도시 - 연여름 지음
2025년 10월 10일(금) 15:20
물결 위에 누운 소녀의 얼굴은 고요하지만, 그 고요 속에는 이미 죽음의 예감이 스며 있다. 초록빛 강물 위로 흩어진 들꽃과 버드나무 가지, 물 위에 반쯤 잠긴 여인의 창백한 손끝은 생과 죽음, 순수와 절망이 맞닿는 경계를 보여준다. 시든 꽃잎이 떠다니는 물 위에서 오필리아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햄릿의 비극적 연인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잔인한 장면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연여름은 “오필리아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장편소설 ‘각의 도시’를 시작했다. 강물에 잠기기 직전의 오필리아처럼 가라앉는 세계 속에서도 끝내 노래를 멈추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배경은 지상과 지하, 그리고 ‘공중도시 라뎀’으로 나뉜 미래 사회다. 주인공 시진은 태어날 때부터 햇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서 살아온 기초수급자, 일명 ‘뱅커’다. 생존을 위해 친구 제레미와 함께 암석사막에서 흑각을 불법 채취하며 살아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7년 전 행방불명된 누나 유진의 빈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 누나는 머리 위로 뿔이 돋는 ‘각인’이었다. 그 뿔은 생명의 일부이자 낙인의 상징이다.

시진은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공중과 지하, 그리고 ‘커터’들의 영역을 오가며 진실을 추적한다. 공중의 질서 아래 각인과 면역인은 서로를 구별짓는 존재로 살아간다. 공중은 각인의 뿔을 자르고 세공하며 통제의 도구로 삼는다.

통제된 도시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과 연대의 감각, 그리고 사라진 이름들을 복원하는 서사는 지금의 현실에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주권을 잃은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문학과지성사·1만8000원>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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