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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 선생과 한복 - 강대석 시인·수은 강항기념사업회 이사
2024년 05월 21일(화) 21:30
지난 17일 광주전통문화관에서 수은 강항선생을 기리기 위한 ‘강항 문화제’의 부대행사로 ‘K-선비 한복 선발대회’의 예선대회가 열렸다. 올해로 다섯 번째 열리는 행사지만 이 행사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강항선생과 ‘K-선비 한복 선발대회’가 전혀 매치가 안 된다며 다소 의아하다는 얘기를 한다. 강항선생이 연예인도 아니고 한복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수은 강항선생은 1567(선조1)년 영광 불갑에서 태어나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좌랑을 지낸 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 전투에 군량미를 보급하던 중 남원성이 왜군에 함락되자 고향 영광으로 돌아와 전 군수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세(戰勢)가 여의치 않자 가족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 휘하로 가려다 염산 앞바다에서 왜군에 붙잡혀 일본에서 2년 8개월간의 포로생활을 했다. 그 기간에 일본의 정세와 지형, 제도 등을 기록한 적중봉소(敵中封疎)를 비밀히 고국에 보내 전쟁을 돕고자 했으며,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性窩)에게 유학을 전수하고 귀환 후에는 후학을 양성하며 저서 ‘간양록’ 등을 남겼다.

수은 강항이 일본에서 지낸 행적은 조선통신사들의 기록에 잘 나타난다. 1607년 전후 첫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 온 정사 여우길의 동사록(실전 됨)과 부사 경섬(慶暹)이 쓴 해사록에 의하면 ‘강항은 포로가 된지 4년(실제 2년 8개월) 동안 형체(形體)를 헐지 않고 의관(조선의 선비 한복)을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방에 앉아 독서만 할 뿐 한 번도 왜인과 더불어 상대하여 웃는 적이 없었다. 이를 왜인들이 귀하게 여겨 공경하니 원근에 전하여 미담이 되었다. 본래 일본은 용(勇)과 무(武)만 숭상하며 인륜을 모르다가 절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면 감탄하지 않은 자가 없이 칭송하니 인간본연의 천성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했다.

조선통신사들에게 일본인들은 곧잘 “강 낭중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느냐?”고 궁금해 하며 “선생의 충의와 절개가 옛 사람들에 비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고 칭송하므로 돌아와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수많은 조선인들이 본분을 잃고 왜에 동화되어 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기에 강항의 의연한 태도가 왜인들로부터 더욱 미담이 되었을 것이다.

또 강항이 교토의 복견성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만난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에게 필담으로 사서오경과 함께 과거 절차, 춘추석전 등의 의례를 가르쳐주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아카마츠 히로미치(赤松廣通)는 이에 심취하여 오례의서(五禮儀書)와 같은 유교 서적을 얻어 보고 자신이 관할하는 단마(但馬)의 사읍(私邑)에다 공자묘(孔子廟)를 세우고 우리나라의 제복과 제관을 본떠 입고 의례 익히기를 일삼았다. 후지와라 세이카 역시 심의(深衣·선비 한복)를 입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앞에서 유학을 강론하기도 했다. 이로써 유학과 함께 우리나라의 제복과 심의가 일본에 전파된 계기가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강항이 왜국 체류 시 고집했던 의관은 바로 조선의 선비들이 입던 선비 한복이며 또 유학을 전하면서 함께 전파된 제복과 심의 역시 조선의 선비들이 의례를 수행할 때 입는 선비 한복의 일종이란 것이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마련된 행사가 ‘K-선비 한복 선발대회’라면 수긍이 갈 것이다. 수은 강항선생을 상징적으로 알릴 수 있는 아이템을 찾다보니 여기에 이르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따라서 선비 한복 선발대회는 상업적 패션 장려가 목적이 아닌 전통 선비 한복을 재현하고 수은 강항이 지키고자 했던 조선 선비의 자존심과 절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강항 문화제’ 본 행사는 매년 9월 20일 ‘강항의 날’을 기념하여 불갑산 상사화축제 기간에 함께 열린다.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