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마스크를 벗으니-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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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마스크를 벗으니-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5월 15일(월) 00:00
희대의 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는 요크셔테리어 ‘열매’였다. 얼굴은 연한 갈색, 몸은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오동통한 강아지다. 나이는 열 살, 사람으로 치면 세 살배기 정도는 되는 제법 말귀가 통하는 녀석이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작은 몸을 활처럼 구부린 채,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바스락 소리만 들려도 두 귀를 쫑긋 세우곤 했을 것이다. 기다리는 일은 그의 오래된 일과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유보되거나 취소된 가운데 대부분의 학교 수업 역시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덕분에 집 밖으로 한 발짝 움직이지 않고도, 굳이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도 맡은 역할이 가능했다. 활동 반경이 좁아지긴 했으나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다. 이 난데없는 바이러스는 오히려 좋은 핑곗거리가 돼 주었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단순화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없애 주었으며 평온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물론 난생처음 온라인 강의를 하느라 진땀을 뺐던 일은 지금도 아찔하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기도 했고 준비 과정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다투며 해내야 했으니 초연결 사회를 살아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노심초사 강의 영상을 만들고 자료를 올리고 피드백을 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곤 했다. 은둔자 아닌 은둔자가 아니 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가끔 근처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무장한 도적처럼 집 밖으로 나서면 왠지 자유를 되찾은 기분이랄까, 해방감이 몰려왔다. 표정도 스타일도 전혀 신경 쓸 것이 없는 데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 익명의 자유를 장착하고서 ‘산책’ 소리만 들어도 단박 설레 버리고 마는 ‘열매’를 대동하고 보면 제법 구색이 맞춰진 듯했다.

큰 강줄기를 지척에 두고 있다는 것은 축복임이 분명했다. 사철 내내 훌륭한 풍광을 아무에게나 허락하는 것은 아닐 터. 멀리 아파트 숲이 우거져 있긴 하지만, 지천에 꽃들 피어 있고, 물오리들 놀고, 징검다리가 있고, 흰 고니들 떼 지어 한가롭고, 새들 지저귀며 포르릉 날고, 넓은 운동장이 몇 개나 있고, 억새 나부끼고, 길은 한없이 이어져 끝이 안 보이는 풍경을 아무나 걸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 시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지 ‘열매’의 표정도 사뭇 해맑았다. 녀석에겐 도대체 언제쯤 밖으로 나갈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이고 보면, 자신이 갇혀 사는 신세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밖으로 나가는 걸 어찌 그리 좋아할 수 있으며, 심지어 마구 졸라대기까지 하겠는가. 녀석은 나오기가 바쁘게 큼큼 하늘 땅 그 기미부터 살폈다. 풀들은 안녕하신지, 땅속 안 보이는 것들도 다 잘 있는지, 풀 냄새 바람 냄새 맡으며 여기저기, 요리조리 촐랑거리며 다녔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 어딘가를 마음껏 나다닐 때, 산을 오르거나 물가를 걸을 때, 매인 데 없이 활보할 때 녀석처럼 자꾸 까불거려졌다. 멀리는 못 가지만, 건물도 없고 하늘과 땅과 풀과 나무와 물이 가득한 곳을 걸으니 몸도 마음도 해낙낙 풀어졌다. 게다가 우리는 두 발로 걷거나 네 발로 걷거나 다만 하늘과 땅 사이의 어린 존재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살아가는 같은 처지임에랴.

저물녘, 발갛고 둥그런 햇덩이가 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주홍색도 아니고 살구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빨간색도 아닌, 세상의 모든 ‘붉음’을 그윽하게 품어 안은 빛깔이랄까. 요즘처럼 어수선한 세상에 저토록 순열한 빛이 있을 수나 있을까. 무릉(武陵)이 옌가 하노라, 옛사람의 글귀를 저절로 음미했다. 사선을 넘어가듯 해가 기울고, 강물이 흐르고, 잔물결 어리고, 물속에 하늘 그리메가 곱게도 비치고, 억새가 나부끼고, 바람이 스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강아지가 걸어가고, 걷다가 큼큼 풀냄새를 맡고, 부르면 달려오고….

코로나가 얼추 종식을 알리고 생활은 비대면에서 대면으로 바뀌었다. 나 역시 마스크도 벗고 모자도 벗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눈만 내놓고 다니던 시절은 벌써 기억 속으로 밀려났다. 꽃들이 피고 여기저기 축제가 한창이다. 모든 것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면에 우리집 ‘열매’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산책도 뜸하고 살찐다고 간식도 금해졌다. 강변길 해찰하던 시간마저 반토막이 되었다. 세상이 다시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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