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용기-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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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용기-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3년 05월 07일(일) 23:00
기다리는 일은 일상이다. 우리 삶의 99%는 기다리는 일일 게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밥이 익기를 기다리고, 벼가 여물기를 기다리고, 아이가 귀가하기를 기다리는 게 삶이다. 그 기다리는 동사가 멈춘 순간, 명사 기다림은 망부석이 된다.

오늘도 중하지만 내일모레가 있어 오늘이 의미가 있다. 답장을 기다리며 편지를 쓰고, 결과를 기다리며 투표하고, 합격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도전한다. 낙화 앞에서 울지 않는 까닭은 내년 봄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폐창고 뒤로 오래된 나무가 하나 솟아 있다. 우뚝 솟은 모습이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나무 같다. 예전 향교나 서당 주변에 심은 회화나무로 개교 당시 교정 곳곳에 심었으니 수령은 넉넉히 환갑은 넘었을 거다. 그런데 실용성에 밀려 죄다 베어지고, 한갓진 곳이어서 용케 이 녀석만 구차하게 살아남았다.

학교는 늘 생동감이 넘친다. 만사가 수시로 변하고 바뀐다. 아이들은 시시로 크고 때때로 성숙해진다. 자리 바뀌는 데만 신경을 쓰는 사이, 해마다 바뀌는 게시물처럼 학생도 교사도 바뀌기 바쁘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 회화나무는 이 세상 나무가 아닐 뻔했다. 다른 곳으로 쓰러지지 못하도록 밧줄로 고정하고 막 톱을 가져다 대기 직전이었다. 서둘러 막아섰다.

“죽은 나무를 방치했다가 바람에 잘못 쓰러지기라도 하면 지나는 아이들 다치지 않겠어요.”

대답은 지극히 옳고 마땅했다. 하기야 낼모레가 한여름 5월인데도 이파리 하나 내밀지 않은 녀석을 누가 살았다고 하겠는가.

딱 10년 전에도 그랬다. 그때 그 교장 선생님도 같은 이유로 똑같이 톱을 가지고 나오셨다. 그리고 그 교장 선생님도 퇴직하고 그다음 교장 선생님도 퇴직했다. 몇 해 전 일이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나무도 저마다 특성이 다르다. 특히 회화나무는 더딘 나무다. 봄 끝물에서야 겨우 싹을 내민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진득하며 참을성 많은 늦게 핀 나무다. 그래서 ‘학자 나무’라고 하는 모양이다.

도곡온천 가는 길에는 벚꽃이 만화방창이다. 매주 그 길목을 지날 때마다 눈을 주는 나무가 있다. 온통 만발했는데 시치미를 떼고 있는 두 그루, 그 두 녀석은 특이하게 다른 꽃들이 완전히 소멸한 후에야 새초롬 매초롬하게 눈을 떴다. 재작년, 작년에도 그랬다. 그래서 더 황홀했다. 같은 토질, 같은 바람에도 두 녀석만은 서로 언약이라도 한 듯 회화나무처럼 한껏 거드름을 피우다가 꽃을 피웠다. 어느 날 그 그늘에 앉아 늦봄을 만끽하며 물었다. 왜 너흰 이리 게으르냐고. 묵묵부답 두 녀석은 향기만 낼 뿐이었다.

교정의 회화나무는 철 따라 풍경이 경이롭다. 그 나무 위로 햇살과 석양, 천둥과 태풍도 걸린다. 눈이 오면 고고한 학이 무더기 앉는다. 안개나 비바람 속에서는 신령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남루한 공간일지라도 그가 준 시심이나 운치는 이보다 더한 게 없다.

근데 녀석은 누굴 기다리느라 저리 더디게 잎을 피울까. 더 강렬한 자극, 그도 아니면 녀석에게도 은밀히 감춰둔 애인이라도 있는 걸까. 혹여 지난여름 베어진 나무의 향기를 애타게 기다리진 않을까.

나무를 통해 또 물리(物理)가 도리(道理)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배운다. 오래 기다린 만큼 기쁨도 크다. 기다리는 일은 인내도 필요하고 용기도 필요하다. 회화나무의 꼿꼿한 자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진득한 기다림 덕분이다.

근데 녀석에게 저쪽 회화나무의 부재를 알려주면 정말 정말 녀석도 망부석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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