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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디자인, 한국적 색채에 반하다
(13)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한옥 현대식 해석…화이트 큐브 사옥
세계적 거장 데이비드 치퍼필드 설계
한국건축문화대상 등 건축상 수상
지하1층 미술관 역사·색깔 한눈에
2020년 12월 14일(월) 10:00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사옥은 한옥의 중정을 연상시키는 루프가든 등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요즘엔 별 일 없이도 아모레퍼시픽 건물에 들른다. 아니다, 미술관에 가기 위해 일부러 간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좋다. 걸음이 느려지면서 건물을 뜯어 보게 된다. 오래 머물면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비로서 이해되는 비례와 균형의 선택들이다.…”(윤광준의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 중에서)

지난해 여름,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을 지나다 독특한 외관을 지닌 건축물을 ‘발견’했다. 차안에서 잠깐 스쳤는데도 왠지 범상치 않은 ‘포스’가 전해졌다. 주변의 삭막한 고층건물들과는 분위기가 확연이 달랐다. 무엇보다 순백의 깔끔한 건물 한가운데에 자리한 정육면체의 중정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형상화한 사옥 전경. <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1년 만에 둘러본 아모레퍼시픽 사옥(정식명칭·아모레퍼시픽 세계본사)은 감탄이 터져 나올 만큼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했다. 2만여 개의 수직 차양이 규칙적으로 디자인된 화이트 톤의 모더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마당이 있는 한옥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일반 사옥들이 외부인의 접근이 자유롭지 않은 구조인데 반해 외부인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오픈 스페이스 때문이다. 실제로 건물에 들어서면 1~3층을 아트리움 공간으로 설계한 확트인 광장이 가장 먼저 반긴다. 평일 낮인데도 삼삼오오 모여 쾌적한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방문객들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화이트 큐브에서 한국적인 색채가 전해지는 건 데이비드 치퍼필드 건축가의 남다른 설계 덕분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때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접한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그래서인지 절제된 미니멀리즘의 외관은 단아하고 간결한 형태의 백자 항아리를 닮았다. 특히 한옥의 중정을 연상시키는 루프가든 등 한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요소들을 곳곳에 반영했다.

지하 7층, 지상 22층, 연면적 18만8902㎡(약 5만7150평)의 큐브 형태인 건물에는 중간 중간 층사이에 한강·용산공원·남산 등을 향해 열려 있는 빈 공간(void)이 창 역할을 하고 있고, 5층과 11층, 17층에는 5~6개 층을 비워내고 꾸민 루프가든(중정)이 들어서 있다. 임직원들은 건물 내 어느 곳에서 근무하더라도 루프가든을 통해 자연과 가깝게 호흡하고 계절의 변화를 즐긴다.

사옥 1층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PMA)의 소규모 전시공간인 APMA 캐비넷, 세계 각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도록을 열람할 수 있는 ‘전시도록 라이브러리’(apLAP) 등으로 꾸며 누구나 다양한 예술, 문화, 전시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2~3층에는 450석 규모의 대강당, 아모레 홀이 자리해 임직원과 외부 고객들을 위한 복합문화 프로그램 ‘살롱 드 AP’(Salon de AP), 아모레퍼시픽 재단의 인문교양 시리즈 ‘아시아의 미(美)강좌 등 다양한 문화행사에 활용하고 있다.

특히 지하 1층에 조성된 미술관은 아모레퍼시픽의 역사와 색깔을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아모레퍼식픽의 창업자인 서성환(1924~2003) 전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1979년 문을 연 ‘태평양박물관’이 전신이다. 지난 2009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이후 2018년 신사옥 지하에 둥지를 틀었다.

고 서 회장은 생전 고미술을 수집한 미술애호가였다. 현재 아모레퍼시픽의 소장품은 약 5000여 점으로 도자기, 그림, 병풍을 비롯해 비녀, 노리개, 부채 등 옛 여성 장신구들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에는 고려 ‘수월관음도’(보물 제1426호)와 백자 달항아리가 있다.

고미술 특별전에 선보인 도자 컬렉션
미술관은 서성환 회장의 고미술 컬렉션을 모태로 1년에 4차례 기획전을 개최한다. 지난 2018년 8월 3일 개관 기념전으로 멕시코 출신의 캐나다 작가 라파엘 로자노 헤머 작품전을 개최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미술관은 올해 7월 고미술 소장품 특별전 ‘APMA, CHAPTER TWO’를 통해 또 한번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에 선보인 고미술 소장품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폭이 넓게 구성됐다. 전시공간은 총 6개의 전시실로 도자·회화·금속·목공예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품이 관람객들과 만났다.

조용환 아모레퍼시픽 홍보팀 차장은 “이번 전시는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고미술 소장품 특별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통해 한국 고미술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아름다움을 몸소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술관 소장품인 ‘수월관음도’(보물 제1426호)
제1전시실은 진귀한 회화들의 향연이다.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수월관음도’와 ‘감지금은니대방광불화엄경’(보물 제1559호)를 비롯해 근대기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회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오랜 기간에 걸친 보존처리 작업을 마치고 화려한 원형의 모습을 되찾아 처음 공개되는 ‘요지연도8폭병풍’도 출품됐다.

2018년 개최한 고미술 기획전 ‘조선, 병풍의 나라’에 소개되어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던 ‘고종임인진연도8폭병풍’, ‘곽분양행락도8폭병풍’ 등의 작품들도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새롭게 배치했다. 2, 3전시실에서는 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도자공예가 전시됐다. 작품을 개별 쇼케이스에 디스플레이하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 전시실 중앙에 마련된 전시대 위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수백 점의 토기·청자·분청사기·백자를 함께 모아 배치하는 새로운 전시 연출이 돋보인다.

4전시실에는 혼례 때 사용되었던 전통 가마들이 전시되고, 5전시실에는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금속 및 다양한 재료의 공예품이 선보인다. 특히 5전시실은 시간과 종류를 넘나드는 유물들의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띈다. 금속공예는 노리개, 비녀, 거울 등 한국 고유의 정교하고 세련된 장신구가 많다. 6전시실은 전통공예 가운데 주거, 실생활과 밀접했던 목공예와 목가구 소장품을 통해 단장(丹粧)과 규방(閨房)문화를 보여준다. 전통 목가구의 현대적인 미감과 멋스러움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게 흥미롭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독특한 설계와 조경으로 개관과 동시에 2018년 ‘제21회 한국건축문화대상’ 민간 부문 대상, ‘제9회 대한민국 조경문화대상’ 정원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 건축상을 휩쓸었다.

무엇보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용산의 우중충한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용산역 일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는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사옥 일대가 ‘용리단길’이라는 별명이 생겨날 만큼 사람들의 교류가 늘어나는 등 활력을 얻었다. 건축물 하나가 동네의 색깔, 주민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꾼 것이다. 잘 지은 건축물의 힘이다.

/서울=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