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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산책
2020년 11월 25일(수) 06:30
고성혁 시인
내가 사는 부춘동 마을 앞에는 지석강이 흐른다. 그 지석강을 따라 동네 어귀에서 오래된 여관까지 2.5킬로미터의 강변 길이 있다. 그곳에 지금 겨울이 내려앉고 있다. 해거름의 저물녘이면 나와 아내는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코로나로 얼어붙은 삶을 곱씹으면서.

서쪽 산봉우리 위에 태양이 눈부신 빛을 뿜으며 백열등처럼 떠 있다. 해는 곧 떨어지고 지평선 위 산자락이 선홍빛으로 물들면 떨어져 내린 가을 잎들이 사방에서 출렁인다. 겨울이 온다며 펄럭이는 깃발이다. 비산하는 잎들이 가슴을 파고든다. 슬며시 추억과 사랑과 애상이 몸을 세운다. 파문은 고요하게 구부러진 강과 강가를 수놓는, 무수히 흩날리는 갈대와 희디흰 억새들에 부딪친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우우 들려오는 노래,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제 아무리 쇠처럼 강한 사람이라도 그 정경 앞에서는 한갓 집 떠난 과객에 불과하리라.

길은 쓸쓸하다. 사람도 차도 없다. 걸음을 옮기면 넓은 보에 고여 있는 강물. 그 안의 물풀과 굽이치며 흐르는 물살을 따라 흔들리는 바람을 본다. 오른쪽으로 묵은 산길이 꼬부라져 있다. 오래 전 마을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는데 이제 흔적만 남았다. 징검다리로 강을 건넌 뒤 다시 산길을 올라야 마을이 보였다는 동네 영감님의 말씀을 반추하며 그 어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한다.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모퉁이를 돌면 깎아지른 산이다. 숨 가쁘게 가파른 바위틈 속에서 숨겨진 묘지들이 본래의 모습을 허물며 스러지고 있다.

제 모습을 숨긴 채 부수고 해체하는 시간. 이제 그 시간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할 나이에 이르렀다. 저절로 큰 숨이 내쉬어진다. 빗발처럼 부딪는 깔따구를 피해 강변으로 다가선다. 잿빛 고니가 물속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청둥오리는 줄을 맞춰 헤엄치다 우리의 발자국 소리에 푸드득 물방울을 털고 날아간다. 지난 봄밤 그 모퉁이에서 길을 잃은 고라니 새끼를 봤고 재빠르게 도망가는 삵도 봤다. 여름엔 천연기념물 수달까지 보기도 했다. 갈대가 무성한 강바닥 바위에 우뚝 서 있던 녀석은 우리를 보고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퉁사리까지 사는 강이니 수달의 존재가 이상할 게 없다. 길바닥에 로드킬을 당한 뱀들이 죽어있다. 겨울잠을 자기 위해 산에 오르는 길이었을까. 어느 날 꿈틀거리는 뱀을 발견했다. 작대기를 들어 건너편으로 던져 놓고 돌아오는 길, 녀석을 보니 움직임이 없었다. 안타까운 듯 몇 번이고 혀를 차는 아내의 흰 머리가 흔들리는 억새 같아 마음이 수런거렸다. 유한한 삶, 모든 유한한 것들. 그럼에도 우리 안에 남아 떠나지 않는 미련과 번민.

금곡마을을 지나간다. 어둑발이 내려앉은 그 속 어딘가에서 할머니가 숨은 듯 콩을 털고, 어느 때는 백발의 노인이 다리 위에서 라디오를 켜놓고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강물에 흘러드는 라디오 소리. 굽이굽이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는 노인의 추억. 내 가슴에도 한 줄기 회한이 흐른다.

마침내 버스가 온다. 화순 218번 군내버스다. 머리에 노란 불이 켜져 있다. 어둠이 내려앉는 강변을 휘돌아 오는 버스의 노랑 불빛. 더 밝게 빛나는 버스 안 텅 빈 풍경. 강물에 비치는 버스의 그림자가 너무나 외롭다. 먼 길에서 여행자를 만난 듯 가슴이 뛴다. 반갑고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든다. 어떻게 내 마음을 읽었을까. 버스기사도 마주 손을 흔든다. 가슴에 반짝, 알불이 켜졌다. 뜬금없이 다가온 따뜻한 위로. 저물녘을 관통한 아름다운 그 광경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제는 버스를 볼 때마다 손을 흔든다. 내가 나에게 인사하듯. 내 과거에게, 과거 속의 기쁨과 슬픔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떤 이는 마주 손을 흔들어 준다. 어떤 이는 경례까지 한다. 산책의 끝이다. 대숲이 수수수, 맑은 소리를 낸다. 대숲에서 푸드덕거리는 새들. 잠자리를 찾으려는 듯 댓잎을 차며 난다. 드디어 우리 앞에 익숙한 어둠이 펼쳐졌다. 사방은 고요하고 은혜롭다. 강변을 걸으며 평화를 얻었다. 외로움이 깊을수록 삶도 깊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