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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학창의도시 부천
일상이 문학…생활 속 깊숙히 자리잡은 ‘도서관의 도시’
2020년 11월 02일(월) 07:00
문학도시로서의 부천의 강점은 시 전역에 200개 이상의 다양한 도서관을 거느린 풍부한 인프라다. 부천시립오정도서관 내부.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경기도 부천 중앙공원에 가면 친숙한 시 한편이 새겨진 시비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접했던 수주 변영로(1897~1961) 시인의 ‘논개’다. 한국 신시(新詩)의 선구자이자 민족시인인 변영로는 자신의 호를 출생지인 부천의 옛 이름을 따서 수주(樹州)로 정했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정지용도 부천과 인연이 깊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떠나 1940년대 부천에 머물며 소사성당을 건립했다. 소사 성당은 부천 최초의 성당으로 당시 그가 살던(소사동 89의 14) 곳에는 기념 푯돌이 세워졌고 부천중앙공원에는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유명한 시 ‘고향’이 적힌 시비가 있다. 80년대에는 부천을 전국에 알린 스타작가가 등장한다.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쓴 소설가 양귀자다. 전북 출신인 그는 각박한 서울살이에서 밀려난 서민들의 일상을 부천시 원미동을 배경으로 사실감 있게 그려내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펄벅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펄벅 여사의 손때 묻은 타자기.
또한 부천에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소설 ‘대지’로 1938년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펄 벅 여사는 1967년 부천시 심곡동에 보호자가 없는 혼혈인과 일반인을 위한 복지시설인 ‘소사 희망원’을 건립했다. 펄 벅 여사가 부천에 머문 기간은 몇개월 밖에 되지 않지만 한국을 배경으로 ‘살아 있는 갈대’(1963년), ‘새해’(1968년) 등 세편의 소설을 펴냈다.

부천시는 지난 2006년 9월 펄벅 여사의 숭고한 박애정신을 기리기 위해 부천역 인근의 옛 소사희망원 자리에 ‘펄벅 기념관’을 건립하고 지난 2008년부터 ‘펄벅 기념문학상’을 시상해오고 있다. 아담한 2층 규모의 펄벅 기념관에는 세계적인 문호이자 휴머니스트로서의 특별한 생애를 만날 수 있다. 1층 전시실에는 펄 벅 여사의 대표작인 ‘대지’와 ‘살아있는 갈대’의 영문 및 번역본, 그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과 타자기, 가방, 머리핀, 서울명예시민증 등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70~80년대 공업도시의 색채가 강했던 부천시는 만화박물관,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를 통해 명실상부한 문화예술의 도시로 부상했다. 지난 2011년 개관한 한국만화박물관 전경. <사진=부천시 제공>
펄벅기념관에서 눈에 띄는 건 건물 벽면에 부착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로고’ 동판이다. 그러고 보니 부천의 도서관과 복합문화공간, 미술관 등 주요 공공건축물에는 빠짐없이 ‘유네스코 로고’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17년 동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에 가입했다는 일종의 ‘인증 마크’다.

사실 부천시는 문학적 토양이 그리 단단한 편은 아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나 체코의 프라하,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 다른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처럼 내로라 하는 작가나 대규모 출판단지 등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지용이나 양귀자, 그리고 펄벅여사의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부천과의 짧은 인연이 있을 뿐이지 지역 출신이 아닌 데다 변변변 문학 인프라도 없다.

그런 부천시가 3년 전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 네트워크(UCCN)에 도전해 당당히 세계적인 문학도시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는 쾌거를 얻었다. 특히 출판도시 파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건 일대 사건이었다. 이처럼 부천이 UCCN의 멤버가 된 데에는 문화도시를 향한 열정과 시민들의 역량이 있었다. ‘삶을 바꾸는 문학의 힘’. UCCN의 가입신청서에 내건 이 슬로건을 통해 부천의 비전을 보여준 덕분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파주를 제치고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잘 알다시피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부천은 공업도시로서의 색채가 강했다. 서울과 인천 등 대도시에 인접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베드 타운이나 취업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초 지자체 가운데 가장 먼저 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여기에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전국구 브랜드로 성장하면서 서서히 문화도시다운 면모를 갖춰 나갔다. 또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박물관, 만화창작스튜디오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만화산업의 메카로 부상했다. 유네스코위원회가 부천의 손을 들어준 건 음악과 만화, 스토리텔링 등을 기반으로 하는 역동적인 문화생태계 때문이다.

특히 대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문화 환경 속에서 시민들의 문학적 역량을 키운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부천시가 중장기 추진계획으로 제시한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 격상과 창의도시간의 도서관 교류 등은 유네스코가 지향하는 이념에 부합했던 것이다.

부천중앙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수주 변영로 시인의 시비
무엇보다 문학도시로서의 부천의 강점은 풍부한 도서관 인프라다. 실제로 부천은 국내 도서관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도서관의 도시’다. 부천을 방문하기 위해 스마트폰의 지도앱을 열고 특정지역을 검색하면 공공도서관 최소 1개 이상을 목적지 주변 지도화면에서 볼 수 있을 정도다. 공공도서관 17개, 공립 작은도서관 22개, 사립작은도서관, 학교도서관 등 부천시 전역에 200개 이상의 다양한 도서관이 운영중이다. 5~10분 이내면 도서관에갈 수 있을 만큼 시민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 있다.

하드웨어 뿐만이 아니다. 전국 지자체 최초로 도서관 상호대차서비스를 시행해 집이나 사무실에서 도서관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1~2일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도서를, 원하는 도서관에서 받아 볼 수 있는 등 말 그대로 시민들의 일상을 ‘문학적으로’ 바꾸어가고 있다. 지난 2017년 상동도서관에서 처음 시작한 ‘일인일저(一人一著) 프로젝트’는 문학도시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지도자양성과정을 통해 배출된 42명의 강사들이 복지관이나 작은 도서관에 파견돼 시민들의 글쓰기를 도와주는 것으로, 지난 2019년에만 3513명이 참여해 총 174권의 문집이 발간됐다.

이밖에 부천의 문화가치를 해외에 알리기 위한 ‘2020 부천레지던시’은 코로나19에도 입주작가 2명(영국 1명, 캐나다 1명)이 방문해 현재 운영중에 있고, 문학을 통한 세계 연대를 확산하기 위한 ‘제1회 디아스포라 문학상도 제정했다.

이처럼 부천이 UCCN에 가입한 지 3년만에 굵직한 성과를 거둔 원동력은 행정의 지속성이다. 문학도시로서의 담대한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 시 산하에 ‘문학창의도시 부천’을 주도적으로 이끌 전담 사무국을 신설한데 이어 거의 모든 문화시설에 유네스코 로고를 내걸어 도시 이미지를 브랜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실제로 UCCN의 홈페이지에서 부천을 클릭하면 사무국 이외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부천시청이 링크돼 있어 부천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말하자면 창의도시 부천을 전 세계에 알리는 홍보 플랫폼으로 톡톡히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화 창의도시팀장(문화경제국 문화산업전략과)은 “올해 처음 진행하는 레시던시 작가들이 먼 훗날 한국에서의 ‘경험’을 작품에 반영해 부천을 알리게 된다면 문화·창의도시 부천의 장기적인 비전을 실현되는 효과가 될 것”이라면서 “지속적으로 문학창의도시간 협업은 물론 탄탄한 창의도시 인프라를 갖춰 UCCN국제총회 유치 등 외연을 넓혀나가는 게 부천시의 장기목표”라고 강조했다.

/부천=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