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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가야가 전라도까지 차지했다고?
2020년 09월 17일(목) 00:00
최근 ‘호남 가야’라는 낯선 용어가 나타났다. 경상도에 있던 가야가 전라도까지 차지했다는 것이다. 지난 2018년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사적 제542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호남 가야 유적’이란다. 옛 무덤은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을 드나드는 널길이 있는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과 시신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안치하는 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로 구분한다. 이중 횡혈식은 백제계이고 수혈식이 가야계라는 것이다. 남원에서는 이 두 가지 무덤 형태가 다 나왔는데 횡혈식은 어디로 사라지고 가야 유적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충남 논산 모촌리 고분군은 수혈식 석곽묘 13기와 횡혈식 석실분 1기가 나왔는데 백제 유적으로 분류한다. 충청도의 수혈식 무덤은 감히 가야계라고 말하지 못한다.

지난 2019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영호남 가야 한마당’에는 이철우 경북 지사, 김경수 경남 지사, 송하진 전북 지사가 참석했다. 이들은 “영·호남에 폭넓게 분포했던 가야의 역사적 위치 재정립을 통해 영·호남 상생 발전의 길을 모색하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사실 여부는 둘째 치고 경상도의 가야가 전라도까지 차지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상생·협력의 길’인가? 그렇다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야말로 영·호남 상생 발전의 길이 아닌가?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남북한 상생 발전의 길’이라고 북한 학자들에게 주장한다면 무엇이라고 답할까?

가야가 전라도까지 차지했다는 주장의 유래를 북한 학자 조희승에게 들어보자.

“지난날 일제 어용사가들은 고대시기 남부조선 일대가 일본(야마또)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조작하고 가야의 영역을 혹심하게 외곡 날조하였다. 그들은 가야의 영역을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지명들에 ‘기초’한다고 하면서 오늘의 전라도나 심지어 충청도까지 포괄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였다. 그것은 가야의 영역이 넓어야 일본의 이른바 ‘식민지’ 지배영역이 넓어진다는 지배주의 관점에 바탕을 둔 궤변이었다.”(조희승, ‘가야사’)

가야의 영역이 전라도·충청도까지라고 억지 주장을 한 것은 일제 어용사가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가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임나라고 생각한다.

더 심각한 것은 가야(임나)가 전라도·충청도까지 차지했다고 최초로 주장한 인물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 깡패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라는 점이다. 아유카이가 ‘일본서기 조선지명고’라는 책에서 임나(가야)가 전라도·충청도까지 차지했다고 우겼고,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일제 패전 후 ‘임나흥망사’에서 같은 억지를 펼친 것이 지금 ‘영호남 상생 발전의 길’이란 용어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에 일본 극우파들로부터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받으며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해 대학에 자리 잡은 학자들이 ‘가야=임나설’을 주장하면서 가야가 전라도까지 점령했다고 우겼는데, 이것이 현재 ‘영·호남 상생·발전’이라는 논리로 통용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전북은 가야(임나)가 모두 점령했고, 곧 전남까지 점령할 기세다. 전남 순천시 서면 운평리 고분군이 가야계라는 것이다. 가야가 전북·전남까지 다 차지했으면 백제는 어디로 가나? ‘삼국사기’는 백제 동성왕이 재위 20년(498) 탐라(제주도)가 세금을 바치지 않자 정벌하러 무진주(武珍州: 광주)까지 내려갔는데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해서 그만두었다고 서술했다. 백제 강역이 전라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가야가 전라도·충청도까지 차지했다는 억지는 낭인 깡패 아유카이가 ‘임나일본부’를 한국 남부 전체로 확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 낭인 깡패의 억지를 지금 중앙정부는 물론 각 지자체들까지 막대한 국고를 써가면서 현실화하고 있다.

필자는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을 이 나라의 주류 역사관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별꼴을 다 봤다. 하지만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 깡패 아유카이의 망령이 나라를 휩쓰는 꼴까지 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언필칭 적폐 청산을 내건 이 정권 아래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