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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우리는 모두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어 -은모든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2020년 06월 18일(목) 00:00
은모든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를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우리가 아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이 이야기가 얼마나 들어맞는지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소설의 관습을 배반했다고 보기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소설의 얼개를 유지하는 거대한 사건은 별반 일어나지 않고, 주인공인 경진 또한 운명적 사연이나 영웅적 의지는커녕 그저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것도 과외교사로 열심히 일하다 겨우 사흘의 짬을 내 휴가를 갖는 사람, 그러니까 엄청나고 대단한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비범한 인물을 만나면 소설적 결기나 드라마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경진의 주위 사람들은 경진보다 더 평범한 일상을 산다. 결혼 준비를 하고, 육아를 하고, 홀로 노년을 견딘다. 노견을 기르고, 딸아이 진로를 고민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계획한다.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 모두가 사흘간의 달콤한 휴가를 만끽해야 할 경진에게 말을 건넨다. 그저 말을 건네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그들의 소통 창구가 ‘말’이 아닌 ‘이야기’임은 매우 중요하다. 말은 의사소통의 기본적인 수단이다. 자신 앞에 도드라진 현상을 표현하거나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말을 한다. 비키세요. 도와주세요. 물 좀 주세요. 이거 얼마예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등등. 그렇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이야기는 현상 너머의 이면을 전시한다. 이야기는 내 앞의 문제를 무엇 하나 해결해 주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들려온다.

이야기에는 이야기 속 인물의 삶이 있다. 소설이 되기 전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나 자신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표현할 수단으로 이야기를 오래도록 택해 왔다. 나를 이야기한다. 너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단순한 의사소통이 아닌, 대화의 기본 전략이 된다. 그 이야기에 적절한 플롯과 단정한 문장이 더해지면 소설이 된다. 그 이야기가 배우의 연기에 의해 수행되면 영화나 연극이 되고, 길게 이어지면 드라마가 된다.

그것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이야기다. 그러나 플롯이 없다고 하여, 그저 개인적 체험이나 사연이라고 하여 그게 이야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는 그 사실을 잘 안다. 인물들의 이야기는 소설은 될 수 없겠지만, 분명히 이야기다. 소설은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모아 소설이라고 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플롯의 선택은 그리하여 과감하다. 이야기와 이야기를 연결하는 이야기. 그 연결에 ‘듣기’가 있다. 주인공 ‘경진’은 그리하여 듣는 사람이 된다. 각기 따로 노는 것 같은 이야기는 책의 추천사에 나오는 말마따나 오목한 도자기 같은 경진의 속에 차분히 안착한다. 지나친 호의나 냉정한 돌아섬 없이 경진은 그들의 말을 듣는다. 경진 덕에 소설의 독자들은 여럿의 이야기를 이어 듣는 호사를 누린다. 그 이야기에는 그들의 삶이 있다. 놀랍게도 각기의 삶을 살아 내어, 기어코 만들어진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고, 듣는 행위는 우리를 공생의 관계로 만들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서로를 지켜 낼 수 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위무할 수도 있다.

소설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를 살아왔던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이야기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을 위로해야 마땅한 이야기이다. 사우나에서 만난 세신사 아주머니의 사연을 듣는 경진. 장소가 장소인지라 서로 더 꾸밀 것 하나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보호를 받는다. 누구나 비극적 사고를 겪을 수 있고,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별의별 이야기를 수집하는 데 열중인 듯싶었던 이 소설은 끝내, 이야기의 주인이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까지 다다른다. 그것은 피해자의 이야기다. 이야기로 연결됨은 곧 이야기로 연대함이다. 이야기의 위대한 힘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