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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이강, 북송 말 금나라와 전쟁 이끈 명장

2020년 05월 12일(화) 00:00
<초당대총장>
이강(李綱, 1083~1140)의 호는 양계로 복건성 소무 출신이다. 북송 말 왕조를 지키기 위해 금나라와의 전쟁을 이끈 명장이다.

복송 휘종 정화 2년(1112년) 진사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1115년 감찰어사와 진중시어사에 취임했으나 직언으로 파직당하고 부원외랑으로 전임되었다. 당시 북방은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다. 북송은 요나라에 빼앗긴 연운 16주를 탈환할 목적으로 금과 해상맹약을 맺었다. 1122년 송·금 연합군은 연경(현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요와 맺은 비밀 협약이 알려지면서 격노한 금의 태종은 북송을 거세게 몰아부쳤다. 금의 대군은 수도인 개봉에 몰려들었고 사직은 풍전등화 상태에 빠졌다. 이강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휘종이 황제의 자리를 태자에게 양위하여 전국에서 호걸을 모집해 이들과 함께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휘종은 이강에게 조정에 나가 그 생각을 피력케 하였다. 이강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상소문을 올렸다. “폐하께서는 황태자에게 제위를 양위하여, 그로 하여금 종묘사직을 지켜내고 온 군대의 마음을 모아 오랑캐를 죽음으로 막아내도록 하십시오. 만일 신의 생각을 받아들여 그대로 따르신다면 천하가 가히 보전될 것입니다.” 어깨를 찔러 혈서(血書)를 적었다.

다음날 흠종이 즉위했다. 1126년 정월 금군이 황하를 건넜고 태상황이 된 휘종은 강남의 진강으로 도주했다. 양양으로 피신하도록 건의를 받은 흠종에게 병부시랑 이강은 상소해 주장하기를 “중신들이 폐하를 모시고 지방으로 달아나려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직이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재상 백시중이 말하기를 “현 상황에서 도성을 어찌 지켜낼 수 있겠소?” 이강이 성벽이 견고하고 높아 지킬 수 있다고 하자 그를 동경유수로 추천해 도성을 방어토록 하였다. 섬서로 가겠다는 흠종의 뜻을 바꾸어 개봉에 남도록 하였다.

금과의 강화 협상에서 금은 이강의 파면, 금 500만냥, 은 5천만냥, 우마 1만 마리, 비단 100만필을 요구했다. 또한 금의 황제를 백부(伯父)로 존경하고 중산, 하간, 태원의 3진 20주를 양도하며 재상과 친왕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금은 양도를 약속받은 3진을 손에 넣을 실리적 목적으로 포위를 풀고 북으로 철수했다. 포위가 풀리자 개봉에서 다시 주전론이 일어났다. 항전파 이강의 복귀, 채경, 동관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금은 다시 남하해 개봉을 포위했고 북송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 흠종은 뒤늦게 이강을 자정전대학사, 영개봉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호남성 창사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북송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휘종과 흠종은 금군에게 생포되어 북으로 연행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정강지변(靖康之變)이다.

남쪽으로 도망간 황실은 남경에 새로운 조정을 세웠다. 흠종의 동생으로 금의 인질이 되었다가 돌아온 강왕 조구는 고종으로 즉위해 남송 왕조를 세웠다. 1127년 5월 고종은 이강을 상서우부사 겸 중서시랑에 임명했다. 그는 새로 군대 조직을 편성해 적절한 인물을 지휘관으로 삼아 금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그러나 왕백언, 황잠선 같은 중신들은 금의 남하를 피해 동남 지방으로 피난갈 것을 주청했다. 이강은 이를 반대하고 양양과 등주의 방어를 든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방창 등 금에 투항한 조정 관리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을 주청했다. 금과의 결전을 싫어한 고종과 화친파는 결국 이강을 사직케 하였다. 1139년 정월 남송과 금은 강화조약을 맺었다. 송은 스스로를 신하로 칭하고 금에게 공물을 바쳤다. 다음해 망국의 한을 품은채 병사했다. 1189년 남송의 효종은 충정(忠定)의 시호를 하사했다.

주자는 이강의 사당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군왕이 있음을 알 뿐 자신의 몸은 돌아보지 않았고 천하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자신의 몸에 재앙이 미치는 것을 연연해하지 않았다. 참언으로 여러번 해촉되었지만 군왕을 사랑하고 국가를 근심하는 마음은 절대 없어지지 않았다. 가히 일세의 위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