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당(石塘) 나경적(羅景績)의 실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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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石塘) 나경적(羅景績)의 실학사상
2020년 02월 03일(월) 00:00
호남은 역시 대단한 곳이다. 이른바 ‘실학’이라는 학문은 서울과 근기(近畿) 일대에서만 활발하게 논의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가 이미 밝혔던 대로 18세기 호남에서는 ‘3천재’(三天才)라고 불린 여암 신경준, 존재 위백규, 이재 황윤석 등 탁월한 실학자들이 활동하여 서울과 근기 지역의 학자들에게 내리지 않을 업적을 남겼었다. 평안도·함경도·황해도는 물론 충청·영남 지역 어느 곳에도 발군의 실학자가 배출되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호남은 대단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경준보다 20년 먼저 태어난 호남의 탁월한 실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석당 나경적(1690∼1762) 이었다. 3천재의 명성이 너무 높아 선배 학자가 크게 알려지지 못했음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다. 70이 넘은 넉넉한 수를 누리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거의 대부분 일실되어 전해지지 않은 탓으로, 석당의 업적은 묻히고 알려지지 않은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묻힐 수도 잊힐 수도 없는 너무나 위대한 실학자였다.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언급은 되었지만, 유문이 발견되지 못하고 또 자료가 없어 연구자들이 나오지 않아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 ‘국역 석당실기’(안동교 엮고 옮김)라는 참으로 희소가치가 큰 책자가 나오면서 석당의 학문 일부가 세상에 알려지는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귀한 자료는 본래부터 있었다. 한 인간은 그 인간에 대하여 누가 어떤 평가를 하느냐에 따라 비중이 달라진다.

비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공자가 그를 수제자로 여겨 인품과 학문을 가장 높게 평가했던 이유로, 안회(顔回)는 공자 문하의 최고 인물로 평가받았다. 석당을 평가한 한 편의 글은 크게 알려진 실학자 담헌 홍대용(洪大容,1731∼1783)이 석당의 죽음에 바친 한 편의 제문(祭文)이다. 홍대용이 어떤 인물이고 그의 학문의 깊이와 높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한 글은 바로 담원의 친구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지은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이라는 글이다.

석당에 대한 기록에는 유집(遺集)이 있어 글이 전해진다고 했으나, 지금 전하는 글은 아주 희소하다. 안회가 유집을 전하지 못했으나 공자의 평가로 그를 알아볼 수 있듯이, 이제는 홍대용의 글 한 편으로 우리는 석당을 알아볼 수 있다. 홍대용은 30세도 더 위인 석당을 스승으로 모시며 실학을 배웠으며, 석당의 죽음에 당연히 조문하고 슬픔을 표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여러 가정 사정 때문에 직접 문상을 못 하고 뒷날 지인을 통해 제문을 바치는 예의를 차렸다.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의 대표적 실학자 홍대용은 이용후생의 실학에 뛰어난 석당의 인물과 학문에 대하여 사심 없이 훌륭한 평가를 내렸다.

“천문(天文)의 현상 모두 갖춰지니(大象咸具)/ 하늘과 땅의 위치 발라지고(乾坤正位)/ 해와 달 도수를 따르니(日月循度)/ 그믐과 초하루 시간에 맞고(晦朔隨時)/ 사계절 어긋나지 않았네(節氣弗특)/ 신기한 기계와 오묘한 열쇠는(神機妙鍵)/ 다 마음의 깨달음에서 나왔으니(悉出心得)/ 꼭 재주만 뛰어나서 그랬으랴(豈惟才美)/ 온 정신을 모두 쏟은 탓이리라(精神之極)” 이런 몇 구절의 글은 석당의 자연과학에 대한 학문 수준을 넉넉히 알게 해 준다. 천문학에 밝아 하늘 땅의 위치, 일월의 도수, 초하루와 그믐의 시간, 사계절의 시차까지 모두 통했고, 신기한 기계와 그 이용법을 모두 알았으니 창의적인 생각에 재주도 뛰어났지만,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알아내겠다는 지극한 정성을 모두 바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하에 들어가긴 늦었으나(登門雖晩)/ 오랜 지기처럼 마음이 통했네(托契如舊)/ 비밀을 담은 상자를 열어서(發협秘傳)/ 아낌없이 모두를 나에게 넘겨주셨네(不吝付授)” 뒤늦게 제자가 되었으나 오랜 지기처럼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 자신이 실학자가 되었노라는 고백을 했다. 홍대용 같은 대학자의 스승이 나경적이었다니 그가 어떤 사람인가는 그냥 알아볼 수 있지 않은가.

다른 기록에, 석당은 당대의 실학들인 김창흡·조정만 등과 친교가 깊었고, 선기옥형(璿璣玉衡)·자명종(自鳴鐘)·자용침(自용砧)·자전마(自轉磨)·자전수차(自轉水車) 등을 창조·제작한 과학자라고 칭찬했다. 이런 뛰어난 실학자를 오늘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함은 민족의 수치일 뿐이다. 석당은 화순의 동복에서 살았고 금성나씨의 후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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