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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이 된 프레임
2019년 12월 25일(수) 04:50
[홍행기 정치부장 겸 편집부국장]
“(안철수) 문 후보께 묻겠습니다. 제가 MB 아바타입니까?” “(문재인) 항간에 그런 말도 있죠” “(안) 지금 문 후보님 생각을 묻습니다. 제가 MB 아바타입니까?” “(문) 그게 제 생각입니다.” “(안) 아 그렇습니까?” “(문) 그런 이야기를 제 입으로 올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안 후보님, 아니면 아니라고 본인이 해명하십시오. 저 문재인 반대하려고 정치하십니까?” “(안) 지금 그러면 MB 아바타 아니라고 확인해 주시는 거죠?” “(문)하하하 예,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진보·보수진영



지난 2017년 4월 23일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 TV토론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간에 오간 문답이다.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이 장면은, 결과적으로 ‘안철수는 MB 아바타’라는 부정적 프레임을 굳히는 역할을 함으로써 안 후보에게는 ‘대선 패배’의 단초로 작용하게 된다.

인지언어학의 창시자이자 정치 담론의 프레임 전문가로 손꼽히는 조지 레이코프는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안 후보처럼 프레임을 ‘잘못 사용한’ 사례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을 거론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킨 닉슨은 대통령 집무실 녹음 파일을 제출하라는 법원의 요구에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이 났다. 탄핵 요구에 직면한 닉슨은 전 국민을 상대로 한 TV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 am not a crook)

레이코프는 닉슨이 ‘사기꾼’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그 순간 모든 미국인이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안철수 역시 닉슨처럼 경쟁자들이 만들어 놓은 부정적 프레임에 스스로 걸려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프레임’ 이론을 또다시 꺼내는 이유는 총선이 3개월 여 앞으로 다가온 한국 정치에서 촛불혁명 이후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이 절치부심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이 스스로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 담론에서 ‘프레임’은 특정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평가하는 기준 또는 가치관이다. 그래서, 프레임을 만든다는 것은 특정 목표를 위해 오랜 시간과 막대한 자본을 들여 수십, 수백만 명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문제는, 그 보이지 않는 프레임을 활성화하는 것이 바로 ‘단어’라는 점이다.



안철수와 닉슨의 공통점



우리 정치에서 ‘촛불’이라는 단어는 진보 진영의 프레임을 곧바로 최고 수준으로 활성화하는 촉매다. 촛불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탄핵·혁명·공정·적폐청산 등을 연상시키며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아이콘으로 작용한다. 보수 진영이 촛불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다. 반대로 보수 진영은 태극기를 내세워 애국심과 안정·경제·국가안보 등의 단어를 활용한 보수 프레임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레이코프는 ‘상대방이 짜 놓은 프레임에 대항하기 위해선 상대방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프레임은 특정 단어로 활성화된다’는 주장의 연장선인 셈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 정치를 들여다보면 ‘촛불’이 상징하는 공정·혁신·기회균등·적폐청산 등의 강력하고 매력적인 단어들이 서서히 ‘진보 진영’에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공격했던 과거 보수 진영의 온갖 적폐가 지금의 진보 진영에서도 저질러졌을 수 있다는 의혹이 이들 단어로부터 ‘마법의 힘’을 빼앗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극우 보수 미디어가 진보 진영의 프레임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일부 ‘정치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통해 진보 진영에 대한 공격을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진보 진영의 프레임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보수 진영이 사분오열되면서 보수의 프레임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진보로선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다.

내년 4월 총선은 그로부터 2년 후 치러질 20대 대통령 선거의 판도를 가늠할 바로미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진보든 보수든 지금처럼 상대의 실수나 잘못에만 의지해선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점을 되새겨야 할 것 같다.

/redplane@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