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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맛있는 이야기’ ] 황태를 위한 헌사
2019년 11월 21일(목) 04:50
하나의 음식 혹은 식재료가 우리네 삶과 얼마나 친숙한지, 혹은 친숙했는지는 그 명칭을 보면 안다. 친숙한 것일수록 다양한 명칭을 가진다. 명태가 대표적이다. 기본적으로 날것은 생태, 얼린 것은 동태, 말린 것은 북어, 새끼는 노가리라 한다. 잡는 방법에 따라서는 낚시로 잡은 것은 낚시태, 그물로 건져 올리면 망태라 한다. 이를 다시 근해에서 잡으면 지방태, 먼 바다에서 잡으면 원양태라 한다. 말린 것도 북어로 그치지 않는다. 물기가 약간 있게 꾸덕꾸덕 말린 것은 코다리, 겨울 찬바람에 노랑노랑하게 말린 것은 황태 또는 노랑태, 덕장에 걸 때 날씨가 따뜻해 물러지면 찐태, 말리는 도중에 건조대에서 떨어지면 낙태, 하얗게 마른 것은 백태, 검게 마른 것은 먹태라고 한다. 이밖에도 수십 가지 명칭이 더 있다. 하나의 생선에 이처럼 다양한 명칭이 존재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식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명태가 지금은 씨가 말랐다.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 온도가 상승한 탓이다. 한류성 어종인 명태는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 해에 십수만 톤씩 잡혔으나 1990년대부터 어획량이 급감했다. 2006년 60톤을 끝으로 2008년부터는 아예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니 국내에서 소비되는 명태는 대부분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등지에서 잡힌 ‘원양태’다. 이렇게 수입된 원양태 중에서 많은 양이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와 평창군 횡계리에서 황태로 만들어진다.

같은 명태를 말렸어도 북어와 황태는 다르다. 북어는 명태를 ‘그냥’ 말린 것이다. 그냥 말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햇볕과 바람만으로도 족하다. 이렇게 말린 북어는 수분이 빠져나가 부피가 줄어들고 살이 딱딱해진다. 따라서 이를 다시 먹기 위해서는 물에 불리거나 홍두깨 따위로 두들겨야 했다. ‘마누라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두들겨 패야 한다’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담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황태는 밤이면 꽁꽁 얼었다가 낮이면 햇볕에 살짝 녹기를 2개월 이상 반복한다. 이러면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에 공간이 생겨 몸이 두툼하면서도 살은 노랗게 변한다. 그래서 황태를 노랑태라 부르기도 한다. 황태는 함경도 원산의 특산물로, 196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없는 물건’이었다. 함경도나 강원도나 명태가 많이 잡히긴 했지만 강원도는 북어로 만들었고, 함경도 원산에서는 독특한 지형을 이용해 황태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원산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원산과 비슷한 자연조건을 찾아 나섰다. 황태를 말리기 위해서는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두 달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발견한 곳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계곡 입구였다. 이렇게 시작된 용대리 황태의 역사는 어언 60년이 되었다.

한 마리의 명태가 황태가 되기 위해서는 3개월 이상의 시간과 50명의 손이라는 고단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 먼저 원양에서 잡은 명태가 주문진이나 속초·거진항에 부려지면 배를 갈라 알과 내장을 걷어 낸다. 알은 명란젓으로, 창자는 창난젓으로 만들어진다. 손질한 명태는 한계령과 대관령을 넘어 곧장 용대리 덕장으로 옮겨진다. 덕장에 도착한 명태는 현장에서 바로 씻어 ‘덕’이라는 거치대에 건다. 명태가 덕에 걸리자마자 꽁꽁 얼어야 하므로 낮 기온이 적어도 영하 15도는 되어야 작업이 가능하다. 지금은 손질한 명태를 얼려서 덕장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작업이 그나마 수월해졌다. 이렇게 2개월 남짓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황태가 만들어진다. 행여 겨울 날씨가 따뜻하거나 늦은 겨울에 비라도 내리면 크게 망친다. 그래서 용대리 사람들은 황태 말리는 일을 하늘과 사람이 ‘7 대 3’으로 하는 동업이라고 한다.

태백산에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이듬해 3월부터 황태는 시장에 출하된다. 노릇하고 폭신폭신한 속살 맛을 느끼기에는, 갖은 양념을 발라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굽거나, 찜통에서 쪄낸 찜이 제격이다. 하지만 겨우내 매서운 바람과 폭설을 맞으며 깊어진 맛을 즐기기엔, 황태국 만한 것이 없다. 달보드레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한 맛은 혹한을 견디고 만들어진 황태라야만 가능하다. 흔히들 황태국은 술 마신 다음날 해장용으로 좋다고들 생각하는데 이는 절반만 옳다.

황태진국은 전날 쌓인 술독뿐만 아니라 며칠째 몸속에 잠복해 있던 술기운까지 모조리 해독해 주는 신통한 음식이다. 그러니 굳이 해장이니 뭐니 따질 것 없이 수시로 먹어도 좋은 음식이다. 이상은 지친 내 오장육부를 변함없이 달래 주고 위로해 주는 황태를 위한 헌사(獻辭)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