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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독자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2019년 11월 07일(목) 04:50
자아의 향방을 찾아 서성대는 사람도 있고 존재의 시원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후자라고 하여 전자보다 진지한 고민이 덜하다 할 수는 없다. 출근과 퇴근 사이에 이뤄지는 생각과 사유는 어쩌면 보다 본질적이다. 업무 메일의 문장을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 밥을 얻어먹었으면 커피 정도는 사야 할는지, 사내에 청첩장을 어디에까지 돌려야 할지, 내가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는지, 더 나은 부서로 이동은 가능한 것인지, 언제까지 출근과 퇴근을 할 수 있을지 등등. 이런 것들은 자아가 아닌가? 이런 질문은 존재에 닿을 수 없는 것들인가?

신예 작가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런 질문에 공들여 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 빠르고 과감하되, 디테일하고 다정하다.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가 등단한 매체의 웹사이트에 공개되어 전에 없는 화제를 일으켰다. 판교 테크노밸리 직장인의 일상을 다룬 이 소설은 그간 한국 소설이 놓치거나 몰랐던 직업군을 소설의 전면에 등장시켜 새로운 노동자의 전형을 만들어 낸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따라 하고 싶은 스타트업 기업의 의지는 한국 특유의 문화와 업계의 관행과 만나 우스꽝스러운 현장이 된다. 글로벌 아티스트를 먼저 알아보고 초청하는 재벌 후계자는 자신의 자아를 인스타그램에 의탁하고, 그 흔들림에 따라 직원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 세련된 부조리 안에서 개인은 존재하는 것이다. 등 뒤에서 한숨을 흘리는 사회성 없는 동료와 함께, 눈치라고는 밥 말아먹은 옆 부서 동기와 함께.

장류진의 소설은 2019년 대한민국 30대의 삶을 더하고 뺄 것 없이 늘어놓아 되레 유머러스해진 블랙코미디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부터 시작해 답례 떡 맞춤까지 이어지는 결혼 준비의 미친 듯한 꼼꼼함이 대표적인데, 소설의 인물들은 작가가 절대로 그저 지나치지 않는 디테일의 함정에 빠져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고는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긴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 다만 그 위치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판단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는 한국 사람 거의 모두에게는 이미 익숙한 스타일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한국 소설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움이다. 주인공의 지적인 속말이나 상황의 아름다운 묘사가 아닌, 인물들이 부딪치는 작은 현실들의 조합으로 장류진의 이야기는 나아간다. 그럼으로 하여 얻어 내는 장류진의 리얼리즘, 바로 ‘일의 기쁨과 슬픔’이 한국 독자의 올곧은 ‘기쁨과 슬픔’이 되는 까닭이다.

훌륭한 리얼리즘 소설이 그렇듯이 ‘일의 기쁨과 슬픔’도 현실 고발의 기능에 성공한다. 같은 시험으로 입사한 남자 동기와 사내 연애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서로의 연봉이 앞자리 숫자가 다른 이유는 성별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잘 살겠습니다’) 결혼 경험이 있는 옛 직장동료를 만나러 일본에까지 가면서 언제까지나 본인 위주로 관계를 설정하고 기대치를 점쳐 왔던 남성의 허위를 폭로한다.(‘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전방위적으로 일어나는 성매매는 일상의 공간마저도 뒤흔들고, 여성의 주거는 더욱 곤궁해진다.(‘새벽의 방문자들’) 요컨대 ‘일의 기쁨과 슬픔’은 디테일하고 다정한 리얼리즘 소설이자, 여성 혐오와 젠더 불평등을 자연스레 폭로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수록작 중 가장 짧은 소설인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은 폭로가 아닌 위로에 가깝다. 2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주인공의 상황은 이렇다. 연봉 2663만 원. 세후 월 210만 원. 월세 50, 관리비 7, 공과금 10, 인터넷 1, 핸드폰 요금과 할부금 7, 적금 55, 실비보험 12, 블라우스와 구두, 치마, 바지 17, 마트 17, 이하 생략.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만한 생활 혹은 그 앞이나 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것인가? 또한 늦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야근 때문에 아우성인가? 장류진은 그들을 소설로 썼다.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건만, 장류진은 더 나아간다. 이 나아감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첫 발걸음의 눈부심이 이 기대감을 한껏 높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