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으로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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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분노는 살고 있는 “시대의 여러 모순적인 면모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창문 내지는 현미경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 시대의 모순들을 비춰 주는 분노는 인간의 일상을 통해 해소되고 소비된다. 그래서 분노의 소비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분노의 해소와 소비 방식이 파괴적일 수도 있고 창조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면한 문제에 분노하지 않는 ‘무관심’은 매우 위험하다. 이후 파괴적 분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인간의 분노는 인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본성이자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행위는 ‘올바른’ 가치 판단에 기인해야 한다. 작금의 보수와 진보 간의 분노는 인간다움을 위한 ‘올바른’ 가치 판단에 기인하는 자연스러운 행위로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 구동의 도구 중 하나가 ‘프레임’이라면 정치인들은 그 프레임 안에 가치와 차이를 담아야지 차별을 담아서는 안 된다. 미움과 배제를 담아 국민을 양 갈래로 나누고 있는 지금의 정치 행위는 분노의 정치다. 그래서 올바르지 못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파괴적 분노의 결과이다. 파괴적 분노는 새로운 분노 생성의 단초가 될 수 있고, 체념과 자기 파괴로 공동체를 파멸로 유도할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파괴 지향의 분노를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하게 분노해야 한다. ‘창조적 분노’는 ‘정당한 분노’(Anger with good reason)로부터 출발한다. 불의와 부조리한 현실 앞에 분노의 동기를 갖고 저항할 때 이 ‘정당한 분노’는 창조적 분노가 된다. 그리고 창조적 분노는 창조적 저항의 방식이 된다. 스테판 에셀이 자신의 저서 ‘분노하라’에서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는 말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 바로 창조 다시 말해서 창조적 분노라는 의미이다.
‘반대하기 위한 반대’를 위한 저항은 정당한 분노의 결과로 볼 수 없다. ‘정당한 분노’는 불의를 보고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거나 분노를 은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정당한 분노’는 불의로 인한 고통을 타자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는 ‘역지사지’의 공감의 사유를 하게 해주는 분노이다. 이런 점에서 정당한 사회적 분노는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창조적 분노’와 궤를 같이 한다. 결국 ‘정당한 분노’는 분노의 주체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창조적 분노’의 토대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정당한 분노’는 ‘톨레랑스’의 전통과 맞물려 있다. 프랑스어로 ‘관용’을 의미하는 ‘톨레랑스’는 “나와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 정신’으로까지 요약될 수 있는 ‘톨레랑스’는 ‘편견에 치우침 없는 공평함’에 토대를 둔 ‘관용’과 ‘포용력’이다. 타인의 생각과 행동 방식의 다름을 존중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프랑스의 톨레랑스는 다름과 차이를 맹목적으로 ‘용인’(容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름과 차이의 인정은 분노의 창조적 승화의 과정 즉 설득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맹목적 용인은 또 다른 의미의 ‘강요’나 ‘강제’와 같은 파괴적 분노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톨레랑스의 반대어인 ‘앵톨레랑스’(intolerance)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앵톨레랑스’는 불관용(不寬容)을 의미하며 원칙과 가치를 파괴하는 ‘극단’과 ‘배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톨레랑스’는 극단과 배제의 ‘앵톨레랑스’에 대해 단호히 맞서 쟁취하게 된 ‘관용’과 ‘포용력’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톨레랑스라는 단어에는 ‘앵톨레랑스’에 맞서는 ‘정당한 분노’를 함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극단과 배제의 ‘앵톨레랑스’에 맞서게 하는 감성의 도구는 바로 ‘정당한 분노’이며, 이는 결국 ‘편견에 치우침 없는 공평함’을 지키기 위함이다.
조국 사태로 양분되어 있는 우리 사회는 극단과 배제의 불관용으로부터 우리와 국가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이다. “분노할 실마리를 잡아서 분노할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할 줄 알되, 마음 속에는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분노의 동기가 되는 원칙과 가치의 훼손에 대한 ‘정당한 분노’와 ‘비폭력’의 창조적 분노로 저항하라는 의미이다.
정치 구동의 도구 중 하나가 ‘프레임’이라면 정치인들은 그 프레임 안에 가치와 차이를 담아야지 차별을 담아서는 안 된다. 미움과 배제를 담아 국민을 양 갈래로 나누고 있는 지금의 정치 행위는 분노의 정치다. 그래서 올바르지 못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파괴적 분노의 결과이다. 파괴적 분노는 새로운 분노 생성의 단초가 될 수 있고, 체념과 자기 파괴로 공동체를 파멸로 유도할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반대하기 위한 반대’를 위한 저항은 정당한 분노의 결과로 볼 수 없다. ‘정당한 분노’는 불의를 보고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거나 분노를 은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정당한 분노’는 불의로 인한 고통을 타자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는 ‘역지사지’의 공감의 사유를 하게 해주는 분노이다. 이런 점에서 정당한 사회적 분노는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창조적 분노’와 궤를 같이 한다. 결국 ‘정당한 분노’는 분노의 주체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창조적 분노’의 토대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정당한 분노’는 ‘톨레랑스’의 전통과 맞물려 있다. 프랑스어로 ‘관용’을 의미하는 ‘톨레랑스’는 “나와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 정신’으로까지 요약될 수 있는 ‘톨레랑스’는 ‘편견에 치우침 없는 공평함’에 토대를 둔 ‘관용’과 ‘포용력’이다. 타인의 생각과 행동 방식의 다름을 존중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프랑스의 톨레랑스는 다름과 차이를 맹목적으로 ‘용인’(容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름과 차이의 인정은 분노의 창조적 승화의 과정 즉 설득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맹목적 용인은 또 다른 의미의 ‘강요’나 ‘강제’와 같은 파괴적 분노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톨레랑스의 반대어인 ‘앵톨레랑스’(intolerance)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앵톨레랑스’는 불관용(不寬容)을 의미하며 원칙과 가치를 파괴하는 ‘극단’과 ‘배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톨레랑스’는 극단과 배제의 ‘앵톨레랑스’에 대해 단호히 맞서 쟁취하게 된 ‘관용’과 ‘포용력’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톨레랑스라는 단어에는 ‘앵톨레랑스’에 맞서는 ‘정당한 분노’를 함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극단과 배제의 ‘앵톨레랑스’에 맞서게 하는 감성의 도구는 바로 ‘정당한 분노’이며, 이는 결국 ‘편견에 치우침 없는 공평함’을 지키기 위함이다.
조국 사태로 양분되어 있는 우리 사회는 극단과 배제의 불관용으로부터 우리와 국가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이다. “분노할 실마리를 잡아서 분노할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할 줄 알되, 마음 속에는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분노의 동기가 되는 원칙과 가치의 훼손에 대한 ‘정당한 분노’와 ‘비폭력’의 창조적 분노로 저항하라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