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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 검찰과 과유불급(過猶不及)
2019년 10월 17일(목) 04:50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뜻으로 ‘논어’ 선진(先進)편에 나온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에 누가 낫냐고 물었다. 공자가 자장은 지나치고(過), 자하(子夏)는 미치지 못한다(不及)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자장이 자하보다 낫다는 말이냐고 묻자 공자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를 둘로 갈라놓은 조국 장관 일가 사태를 둘러싼 현상을 과유불급이란 잣대로 바라보면 실체가 보인다.

한 법학자가 법무장관에 기용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언행 불일치가 드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법무장관이 되면 나라가 결딴나는 것처럼 검찰과 언론이 사냥에 나설 정도의 하자였는가 물으면 누구도 선뜻 답변하기는 힘들 것이다. 검찰의 행태는 과유불급 정도가 아니라 ‘과유자승’(過猶自繩)이었다. 지나친 것이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는 뜻이다.

그간 공직 후보자에 대해서 언론이 문제 제기한 적은 많았다. 그러나 이번처럼 검찰과 언론이 한 팀으로 대응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조국장관 일가 문제가 심각했다고 할지라도 많아야 형사부 검사 세 명 정도면 충분했을 사안들이다. 표창장 위조 여부, 웅동학원 문제, 사모펀드 문제에 각각 한 명 씩의 검사를 배당해 사건의 실체를 찾았다면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지도 않았고, 검찰 스스로도 ‘정치검찰’이란 올가미에 목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정작 검찰 출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던 검찰이 조국 장관 일가 집안에서는 날아가는 먼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초정밀 현미경을 들이댔으니 그 의도를 의심받는 것은 당연했다.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라는 성어가 있다. 오얏나무 아래서는 오얏을 따려 한다는 혐의조차 받지 말라는 뜻이다. 청문회 당일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여러 야당 의원들이 “부인이 기소되면 사퇴할 것이냐?”고 거듭 묻는 것을 보면서 “왜 저런 질문을 할까?”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그날 밤 표창장 원본도 없이, 피의자 소환 조사도 없이 기소부터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질문들의 뒷 배경이 이해가 갔다.

표창장 위조 혐의의 유죄를 받으려면 원본 확보와 피의자 소환 조사는 필수다. 원본도 없이, 피의자 소환 조사도 없이 기소가 가능한지를, 수사권과 기소권이 분리되어 있는 다른 나라 검찰에 물어보면 “중세 때 마녀사냥 이야기인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수사기관이 표창장 원본과 피의자 조서를 가지고 기소권을 가진 검찰에 이 사건 기소를 요청했을 것이다. 만약 수사기관이 표창장 원본과 피의자 조서도 없이 기소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기소권을 가진 검찰은 “당신 우리를 갖고 노는거야? 이런 사건을 어떻게 법원에 가져가나?”라고 화낼 것이다. 그러나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쥔 이 나라 검찰은 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행태를 버젓이, 그것도 전 국민이 주시하는 과정에서 자행한다.

당연히 형평성은 사라졌다. 일반 국민이 보기에 한 여고생의 표창장 위조 여부보다 그 표창장 발급 대학 총장의 가짜 박사 문제가 더 구조적이고 더 큰 문제다.

‘교육자적 양심’ 운운하던 동양대 총장은 박사는커녕 학사 학위도 없었다. 그가 25년간 총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수많은 사문서 위조와 이를 통한 업무방해 행위가 자행되었을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여중생의 일기장까지 압수하려던 검찰이 이 사건 수사를 위해 수사관 한 명 배정했다는 소식은 아직껏 들리지 않는다. 현대 한국을 지배하는 중세 검찰, 이것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이 사건은 언론의 숨긴 민낯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일부 언론이 심판이 아니라 선수로 뛴 것이다. 언론은 왜 심판 명찰을 달고 선수로 뛰었는가? 조국 장관 사퇴는 이 사건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검찰은 자신들의 과한 행태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고백하고 책임 있는 행동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은 아직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