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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독립운동가 최원순·현덕신의 삶과 발자취
상 2·8독립운동의 주역 최원순
조선청년독립단 비밀결사 주도…2·8독립선언 끌어내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주 출생 광주공립보통학교 졸업
와세다 대학 유학중 2·8선언 주도
日 심장부 강타…3·1운동 기폭제
동아일보 정치부장·국장 대리 역임
2019년 10월 14일(월) 04:50
최원순은 기자 시절 조선총독부 행사에 한복을 입고 나갈 만큼 민족의 자긍심이 높았다. 맨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최원순. <사진 최영훈 전 조선대 미대 학장>




2·8독립선언 주역들과 기념촬영을 한 최원순(원 안이 최원순)




2·8독립선언 주역들과 기념촬영을 한 최원순(원 안이 최원순)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자주독립과 민족자존, 민족자결의 기치를 높였던 3·1운동은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87년 6월 민주화운동, 2016년 촛불시위의 토대가 됐다.

오늘날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H. 카의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100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민초들이 떨쳐 일어난 인권과 자유, 자주에 대한 함성이 역사 속에 고스란히 응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게 2·8독립선언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유학생들이 현지에서 벌였던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으며 이를 기화로 거국적인 독립항일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광주 출신 최원순(崔元淳)과 함경도 태생의 현덕신(玄德信)은 근대 광주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2·8독립선언의 주역이다. 부부였던 두 사람의 활약으로 이후 3·1만세운동은 의미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시리즈는 최원순, 현덕신 두 부부의 근현대사에 남긴 족적을 면밀히 살펴보는 데 의의가 있다. 동시에 근대 광주 정신의 출발이 이들로부터 연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제해, 두 인물의 ‘아름다운 동행’을 시대정신과 연계해 조명하고자 한다.



최원순은 1896년 12월 18일 전남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 293번지에서 최의준과 박보성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를 4회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다녔으며 잠시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이후 최원순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교 정경과에 입학한다. 그가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간 것은 신학문을 토대로 조선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 때문이었다. 일제의 압제에 놓인 조선의 현실은 무참함 그 자체였다. 정의감과 역사의식이 남달랐던 최원순에게 당대의 현실은 기필코 타파해야 하는 숙원과도 같았다.

바야흐로 때는 1919년 2월 8일. 찬바람이 거리를 휘몰아치고, 겨울 특유의 우중충한 빛깔이 드리워져 있었다. 기독교청년회관에 조선 유학생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불꽃같은 굳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와세다 대학교 유학생인 최원순도 그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당시 세계정세는 심상치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과 맞물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약소국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호기가 점차 무르익어가던 즈음이었다.

최원순은, 그보다 앞서 1918년 12월 17일 학숙방으로 찾아온 유학생 정광호와 조선 독립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여기에서 최원순은 김현준, 김안식과 함께 비밀리에 결사를 하기로 의기투합한다. 또한 동경유학생 학우회 회장인 백관수에게 거사 계획을 알리고 1918년 12월 30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연다.

“최원순은 그 자리에서 미국 교포들이 30만원 거액의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소식과 유학생들의 자세와 나아갈 길을 역설하였는데 그 자리는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 김도연, 서춘, 최근우, 이종근, 김철수, 이광수, 송계백이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로 서명하는 자리였다. 최원순은 조직을 규합하는 등 사전 사후의 일을 도맡아 관리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대표자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이동순 조선대 교수, 「동지로 지성으로 함께 한 아름다운 동행」, 2019)

최원순은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서’ 1만장을 몇 날 며칠 비밀리에 등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일인 2월 8일, 일본 유학생 50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 대강당에 모였다. 그 자리에는 황해도 출신인 현덕신도 있었다. 최원순 외에 이광수, 백관수 등 유학생 대표들이 서로 역할을 나눠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당시 현덕신은 거금인 40원을 모아 독립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제국주의 일본의 심장부에서 조선유학생들의 독립의 열망이 타올랐다.

이 일로 최원순은 일제의 요주의 대상인 ‘을 1호’로, 현덕신은 ‘갑 1호’로 분류됐다. 이 같은 차이는 최원순이 선언서 서명자에서 이름을 뺐기 때문인데, 그것은 선언 뒤 벌어질 더 큰 일을 감당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최원순은 이후 벌어진 일제의 감시의 눈초리 속에서도 결연한 의지를 펼쳐보였다. 특히 이광수가 1922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대, 이에 논박하는 장문의 글(동아일보 6월 3일, 4일자 1면)을 게재했다. “민족성 개조의 윤리적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논박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드러냈다.

의로움에 대해 결코 굽힐 줄 몰랐던 최원순의 성정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정치부장, 편집국장대리를 역임하면서 최초 언론인 조직인 무명회와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전 조선기자대회 개최를 주도했다.

그의 호 ‘석아’(石啞)는 돌벙어리라는 뜻이지만,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일에는 기개를 잃지 않았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 출입처였던 조선총독부 초청 행사에 유일하게 한복을 입고 참석한 일화는 유명하다. 일제에 조선사람의 자긍심과 기개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26년 석아는 일제의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동아일보 8월 22일자 칼럼 ‘횡설수설’이 문제가 됐다. 그는 이 일로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3개월간 복역한다.

“총독정치에 대한 비평(批評)이야말로, 정말 기발(奇發)하다. 현재의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롭(利)게 하고 이익(益)되게 하는 인사는 박해하고, 배척 하면서도 조선인을 해롭게 하고 불리케 하는 놈들은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방침이라고, 그러므로, 말하기를, 총독정치(總督政治)는 악당(惡黨)보호정치(保護政治)라고.”

이후 그는 1928년 광주로 내려와 동아일보 광주지국장을 맡아 일하며 최흥종 목사와 함께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활동을 위한 계유구락부를 결성했다. 사실상 계유구락부는 신간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항일운동단체였다. 최원순은 기자시절 조선일보 신석우 등과 신간회 조직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무등산 자락에 석아정을 짓고 요양을 하던 그는, 1936년 만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일제에 의한 고문 휴유증 때문이었다. 2·8독립선언 주역이었던 그의 삶과 글은 100년이 흐른 오늘 별처럼 빛난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