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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 광주 예술고 교감] 틀림 아닌 다름
2019년 09월 11일(수) 04:50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봤음 직한, 요즘은 웹 게임으로도 볼 수 있는 ‘틀린 그림 찾기’ 놀이가 있다. 양쪽 그림을 대조하여 상이한 부분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고, 시간 제한이 더해지면 긴장감에 자못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그런데 왜 틀린 그림일까. 단순한 차이 찾기인데도 차별을 두어, 한쪽은 올바른 그림이고 반대쪽은 그릇된 그림이란 말인가.

언어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생각과 느낌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고(思考)도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들은 잘못된 용어 사용이 ‘인지적 오류’의 한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다른 그림 찾기’라고 부를 때 ‘차별’에서 ‘차이’로 인식의 지평이 전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가 초식 동물이라는 사실도 상식으로 통한다. 그런데 미생물학자인 마르크 앙드레 슬로스는 ‘혼자가 아니야’란 책에서 이게 오해라고 지적한다. 소는 네 개의 위를 가지고 있는데, 되새김위는 그 속에 있는 박테리아와 균류, 그리고 섬모충류들의 발효 작업장이라고 한다. 이들은 메탄가스, 수소, 휘발성 지방산들을 만들어 내고, 이 지방산들이 소의 세포가 에너지를 만드는 데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황당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개들은 풀을 먹기도 한단다. 육식 동물의 대표 격인 호랑이도 필요시 풀을 먹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기분이 우울할 때면 알코올이 발효된 열매를 찾아 먹기도 한다. 그러니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로 양분하는 방법은 학문적 편리함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보편 진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인식을 양분하여 나와 상대로 편을 가르게 되면 자칫 흑백 논리에 빠지거나, 근거 없이 감정에 따라 결론 짓는 감정적 추리 등의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나아가 편을 갈라 같은 편끼리는 사고와 행동의 일치를 강요하게 되고, 우월성의 증표가 되어 상대를 차별하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른쪽으로 올바름을 대신하니 왼쪽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오른손은 ‘바른손’이고, 직장에서 직위가 떨어지면 ‘좌천’(左遷)이며, 서얼의 자손은 ‘좌족’(左族)으로 불렸다.

양분법적 사고 속에서 정답을 정해 놓게 되면 사고가 경직되거나 편향될 수 있고, 이를 의식한 나머지 자유롭게 사고하지 못할 개연성도 있다. 잠자는 아이 침대 위에 칼을 놓아두어도 될까 싶지만, 베트남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 머리맡에 칼을 둠으로써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도록 기원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또한 아이가 잠을 못 자고 보채면 베개 밑에 칼을 놓아두기도 한단다. 칼이 아이를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분적인 것에 근거하여 전체 경험을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될 것이며, 어떤 사건이나 한 개인의 경험을 잣대로 눈앞의 상황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일도 삼갈 일이다. 사람들에게 ‘+’가 새겨진 카드를 보여주면 수학자는 ‘덧셈’이라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이라 한다. 목사는 ‘십자가’, 교통경찰은 ‘사거리’, 간호사는 ‘적십자’, 약사는 ‘녹십자’라고 대답하는 법이니 말이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꽉 막힌 길을 뚫고 민족 대이동을 하여 친인척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추석은 우리에게 통합의 날이며 이 통합은 문화적 경이다. 어제까지 다투던 사람들도 추석 앞에서는 다툼이 없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친지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좌우의 진영 논리를 앞세운 편 가르기가 재현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인간이 인공 지능에 비해 우월한 영역이 공감과 상상력일진대, 온 세상을 골고루 밝게 비추는 한가위의 근본 정신을 세상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컴퓨터도 이진법의 한계를 벗어나는 시대에 이분법적 양분 논리 속에 갇혀 지낼 이유는 없다. 고향 집 한가위 보름달의 넉넉함을 배워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다가서고, 공생과 상호 의존의 지혜를 더불어 나누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