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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아 유 레디?’
박진현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2019년 05월 01일(수) 00:00
지난 3월 어느 날, 오전 11시밖에 안 됐는데도 전시장은 수십여 명의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친구들과 함께 온 듯한 중년 여성들에서부터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넥타이 차림의 40대 직장인까지 다양했다. 이중섭·박수근·김환기·백남준·나혜석·오지호·이인성·이응노·전수천….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나 봤던 거장들의 작품을 ‘직관’해서일까. 전시장의 작품들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했다. 이들 중 일부는 전시장 입구의 카페로 자리를 옮겨 각자의 ‘후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최근 전북 정읍 시립미술관을 다녀간 방문객이라면 ‘격하게’ 공감하는 풍경이다. 3개월 동안 열린 ‘100년의 기다림-한국 근현대 명화전’(1월24~4월20일)은 지방의 작은 미술관을 일약 뉴스메이커로 만들었다. 총 관람객은 3만 2589명이나 됐다. 하루 평균 50여 명에 불과했던 방문객은 이번 전시 기간에는 하루 평균 4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 2015년 10월 개관 이후 가장 많은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광주, 서울, 부산, 수원 등 외지 방문객으로 알려졌다. 이 전시로 정읍미술관은 단숨에 전국구 미술관으로 떠오르는 쾌거를 거뒀다. 정읍 인구가 11만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읍 시립미술관의 기적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미술관의 문턱을 낮췄다는 것이다. 농사짓느라 미술관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는 어르신들이 입소문을 듣고 난생 처음 마실 삼아 전시장을 찾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그림들이 있기에 멀리서 자가용 타고 우리 동네까지 올까….’ 평소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정읍미술관의 존재를 주민들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작은 미술관’이 한국 회화의 거장들을 ‘초대’하게 된 데에는 정읍시의 지원이 컸다. 올해를 ‘정읍 방문의 해’로 정한 시는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콘텐츠를 고민하던 중 ‘빅 카드’를 내놓자는 이흥재 미술관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2억 5000여 만 원의 예산을 들여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가나아트 재단의 컬렉션을 유치하기로 한 것이다. 한 해 전시 예산이 1억 원 남짓에 불과한 정읍미술관으로서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게다가 정읍 방문의 해를 기념해 관람료도 무료로 책정했다.

이처럼 ‘잘 만든’ 전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이 있다. 국내는 물론 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도 관광객들이 대거 몰리는 여름 휴가철이나 연말연시에 블록버스터전 혹은 퀄리티 높은 특별기획전을 내놓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대표 미술관인 광주 시립미술관의 ‘2019년 전시 라인업’은 다소 아쉬움이 있다.

지난달 개막한 ‘남도미술-뿌리 Roots’(6월8일까지)전을 들여다보자. 전승보 관장이 지난해 10월 취임 한 후 처음으로 기획한 전시라고 하지만 국립 현대미술관이 광주를 시작으로 제주·대구에서 여는 ‘2019 공립미술관 순회전’이다. 한데 참여 작가 중 상당수가 얼마 전 막을 내린 정읍미술관 ‘100년 전…’과 겹쳐 의도하지 않게 비교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개막식에서 만난 일부 평론가들은 “한국 미술과 남도 미술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정읍의 감동’을 뛰어넘는 경쟁력을 보여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며 입을 모았다.

오는 7월 개막하는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7월12~28일)와 ‘세계 마스터스 수영선수권 대회’(8월5일~15일)를 기념해 기획한 ‘광주의 맛, 멋’ (가제)전 역시 국내외 방문객들에게 미술의 도시다운 임팩트를 줄 수 있을 지 우려된다. 지역 문화계 안팎에선 전시 예산 1억2000여 만 원을 들여, 그것도 6~7개월 만에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것인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통상 대형 기획전은 최소 1년 전부터 준비하는데 이번 전시는 올 초에야 구상됐기 때문이다.

물론 막대한 예산을 들인 블록버스터전이라고 꼭 좋은 전시는 아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메가 스포츠 이벤트를 보기 위해 광주에 오는 외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선 스케일이나 퀄리티 면에서 독보적이어야 한다.

‘수영대회’ 문화 특수 노려야

더불어 광주는 비엔날레의 개최지이자 유네스코가 정한 미디어 창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올 여름, 전 세계 관광객이 몰리는 천금 같은 기회에 광주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 주는 비엔날레 아카이브나 미디어 아트 콘텐츠를 체감할 수 있는 ‘장’(場)이 거의 없다.

전시는 특정 시간에 가야만 즐길 수 있는 공연과 달리 상대적으로 시간 제약 없이 많은 사람이 둘러볼 수 있는 ‘가성비 높은’ 볼거리인데도 말이다. 광주시와 문화계가 수영선수권대회 특수를 겨냥한 전시 콘텐츠에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다. 이번 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진정한 레거시(legacy, 자산·유산)는 글로벌 무대에 문화 광주의 저력을 보여 주는 것 일 테니. 부디, 이런 염려가 단지 기우에 그치길 바라며….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