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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사면은 없어야 한다
2019년 04월 02일(화) 00:00
다산 정약용은 ‘원사’(原赦)란 제목의 글을 남겼다. ‘원사’(原赦)는 ‘용서란 무엇인가를 따진다’는 뜻이니 요즘으로 치면 ‘사면(赦免)이란 무엇인가’란 의미이다. 다산은 서두에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신하 오한(吳漢)이 죽기 직전 광무제에게 올린 ‘신무사’(愼無赦)라는 세 글자를 문제 삼는다. 사람들은 이 세 글자를 옳은 말로 여기지만, 자신은 어질지 못하고 슬기롭지 않은 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무사’는 ‘삼가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니 다산의 비판은 그럴 만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형벌은 죄에 대한 처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계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때의 실수로 죄를 저질렀다면, 재판의 오류로 인해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경우가 있다면, 또 깊이 뉘우치고 있다면, 사면의 기회가 있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사면이 없어야 한다는 오한의 말은 지나치다는 것이 다산의 논리다. 죄에 대한 처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용서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다산의 말은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새삼 따질 것조차 없다.

그렇다면 다산은 왜 굳이 사면을 따져 본다고 했던 것인가. 문제는 다산의 시대에 사면령이 남발되었던 데 있었다.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반드시 모든 범죄에 대해 대사령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 중죄를 저질러 이제 막 귀양살이를 시작한 자도 즉시 풀려나는가 하면, 혹은 가벼운 죄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어 좋은 시절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법의 고르지 못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사면은 드물게 이루어져야 마땅한데, 너무나 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왕이 즉위했다고, 왕비를 맞았다고, 그 왕비가 아들을 낳았다고, 또 그 아들을 세자로 삼았다고, 역적을 토벌했다고, 가뭄이 들어서 비를 바란다고, 갑자기 벼락이 쳤다고, 명나라 황제가 칙서를 보냈다고 사면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외에도 갖가지 핑곗거리를 찾아 그때마다 사면령을 내렸다.

나라의 경사 운운하면서 사면령을 남발하기에 그 결과 사람들은 도무지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면의 요행을 노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이런 이유로 다산은 ‘나라의 경사’라고 일컫고 사령을 내리는 법을 영원히 없애 버리자고 말한다. 다산은 앞서 자신이 비판한 오한의 말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다산은 구체적으로 도형(徒刑)을 1년부터 9년까지 9등급으로 나누고, 날짜를 철저히 헤아려 356일을 완전히 채워야 1년으로 인정해, 복역 기간을 채우지 않고는 절대 방면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사면의 요행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풀려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다산은 사면령을 없애는 대신 형기(刑期)를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도리어 수형자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전두환 씨가 광주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였다. 한마디 사과하는 말이라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그가 내뱉은 말은 ‘이거 왜 이래!’였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1997년 반란 수괴 등의 죄로 무기징역의 판결을 받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김영삼 정부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반성의 마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이거 왜 이래!’라는 말은 다름 아닌 그 사면의 결과물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산의 말이 옳음을 절감했다. 권력자의 범죄에 대해서는 사면이 없어야 한다.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에 대해서도 벌써 사면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뉘우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사면은 무슨 사면이란 말이냐! 거듭 말하지만 다산의 말은 지금 들어도 백번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