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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현 화순 용암사 주지스님] 아스팔트 위의 배달기사
2018년 07월 20일(금) 00:00
장마가 끝났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연일 폭염이 이어진다. 전방 11시 방향, 신호 대기 중인 차량 행렬 사이로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다. 이 불볕 더위에 두꺼운 헬멧을 쓰고, 제법 두꺼워 보이는 긴팔 옷을 입고 그 위에 다시 주머니 많은 조끼를 입은 남자가 타고 있다. 한눈에 봐도 배달 오토바이다. 보고만 있어도 덥다.

‘아스팔트 위의 저 남자 얼마나 뜨거울까. 이 뜨거운 날씨에 온 머리를 꽁꽁 감싸는 저런 헬멧을 쓰고 있으면 얼마나 답답할까. 하필이면 옷도 시꺼먼 색이네.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차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매연도 장난 아닐 건데…’

태양이 이글거리는데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태양이 핵융합 반응을 멈추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꼼짝없이 죽어야 한다. 강물이 그토록 부지런히 흐르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강물이 우리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다. 아마도 일벌들은 여왕벌에게 고용되어서 마지못해 꿀 채집을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태양은 그냥 빛나고, 강물은 그냥 흐르고, 일벌은 그냥 일한다. 그런데도 태양과 강물은 만물을 소생하게 하고, 벌은 달콤한 꿀을 선사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원래 만물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하기 이전부터 한 몸이었다. 태양과 강과 벌과 내가 원래 하나이고 한 몸인데 짐짓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 홀로 빛나는 별은 없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인간의 사회적 노동 역시 누군가를 위한 봉사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배달 기사처럼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을 위해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열심히 봉사하며 살고 있다. 티끌만큼의 집착마저 없음은 물론이요 봉사한다는 생각조차도 내지 않고 모든 존재들에게 봉사하겠다는 보살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관한 고정관념을 머리 속에서 말끔하게 지우고 우리 사회를 보면,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는 이타행을 실천하는 성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나의 욕망이 충족되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자비심, 봉사 같은 덕목이 들어설 자리에 개인의 이기심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우리들의 이타적인 봉사는 이기심에 저당 잡혀 있다.

몇 년 전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이 세간에 자주 오르내린다.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이 시스템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의 비유다. 역사 이래로 많은 이들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나의 불행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타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노예가 그랬고, 농노가 그랬고, 민초가 그랬다. 인류 불평등은 매우 뿌리 깊은 현상이다.

요즘 세상은 타인의 삶에 무관심해도 당장 살아가는데 별 문제 없다. 이 시스템이 알아서 친절하게 세상과의 소통을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굳이 두꺼운 지갑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카드 하나면 만사형통이다. 한 장의 카드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카드 한 장으로 만든 세계이므로 카드만 사라지면 곧바로 무너지고 마는 세계다. 편리한 만큼 허망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카드 한 장의 편리함에 길들여졌다. 그 결과,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이라는 벽을 높이 쌓아 놓고 혼자만의 방안에서 세상을 접할 뿐이다.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

꽉 막힌 도로 위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1억 원 정도는 가볍게 넘을 듯한 비싼 차부터 배달 기사의 오토바이까지 각양각색의 탈 것들이 도로 위에 늘어서 있다. 각자 자기 차 안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신호등의 불빛에 좌지우지되기는 매한가지 신세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경제 살리기가 1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하다. ‘일자리 쇼크’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로 고용시장은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부동산 투기 역시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최저 임금제 인상은 노사 양측 모두로부터의 저항에 부딪혔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일도 이리 힘든데 이기심을 위한 이타적인 봉사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회 정의의 실현 없이 불교적 이상향을 말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남의 양을 열심히 세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미안할 정도로 오랫동안 신호는 바뀌지 않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신호가 바뀔 때까지 나의 불편한 시선은 저 배달 오토바이에 붙잡혀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