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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무 피아골피정집 관장 신부]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2018년 06월 08일(금) 00:00
우여곡절 끝에 결국 북미 정상 회담이 6월 12일에 열린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차례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이고, 흥이 절로 나는 일입니다. 지난 4월 27일과 5월 26일에 이루어진 최근 두 차례의 남북 정상 회담이 보여주었듯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주 만나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서 자기편 주장만을 내뱉는 독백(mono-logue)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dia-logue)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입장을 보다 정확히 확인하고 타협하면서 공생(共生)하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공생을 전제로 해야 진정한 만남과 대화가 될 수 있겠지요!

‘비핵화 로드맵’과 ‘북한 체제 인정’, ‘종전 선언 이후 평화 협정 체결’은 독백의 결과가 아니라 대화의 결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공생의 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과 수많은 과정을 거칠 것이고, 결코 적지 않은 고통과 난관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만남, 대화, 결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평화와 안녕을 위한 중요한 선택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들의 만남과 대화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부디 각국의 모든 구체적인 국민과 시민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번 일련의 만남과 대화에 관심을 보이고 염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른바 ‘세기의 만남’이라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책무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공동선과 평화를 위한 ‘일상의 만남’이기를 바라고,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하는 환경 조성이 시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진행 중인 관련국 정상들의 만남과 대화가 잘 성사되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북간 그리고 북미간 정상 회담들의 원탁에서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작금의 국내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정 농단을 씻어내며 적폐 청산을 이루어내고 있는 과정에서 또 ‘미투 운동’, ‘블랙리스트 파동’, 또한 최근의 ‘사법 농단’ 소식을 접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제반 영역 안에서 우리 시민들이 잃어가고 있는 ‘주인공’으로서의 자리를 다시 인식하고 찾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지난 촛불 집회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6·13 지방선거에서도 선거 때만 우리 시민을 ‘주인공’으로 대우하고 당선 후에는 지나가는 ‘객’으로 보는 그런 후보자를 뽑지 않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정당이나 공약의 이불리(利不利)를 떠나서 말입니다.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나 신도들을 신앙 생활의 주체적인 ‘주인공’으로 보지 않고 제도적 종교의 ‘대상’으로만 치부하고 희생과 의무만을 강요한다면 이미 종교적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이며 이 사회의 평화와 안녕을 해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세적인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매년 6월을 ‘예수 성심 성월(聖月)’로 지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聖心)을 묵상하는 신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를 통해 인간 모두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준다고 신앙하며 기도하는 중요한 신심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구원의 보편성’은 국적이나 인종, 종교나 문화, 각 개인의 능력이나 사회적 신분 등을 따지지 않고, 한 명도 예외 없이 당신의 품안으로 품어주신다는 믿음을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천주교에서 믿는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시고, 늘 우리 모두를 우리 삶의 ‘주인공’으로 살도록 배려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6월에는 남북을 비롯한 주변국의 정상 회담을 통한 변화와 6·13 지방선거를 통한 변화, 그리고 지속되는 적폐 청산 과정을 통한 우리 사회의 변화가 평범한 시민들의 평화와 안녕을 한층 앞당기는,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에서부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루카 11,2) 되도록 기도합니다.